불교가 숭불정책이던 고려 시대에는 권력과 가까웠다. 억불정책이던 조선시대에는 중생과 가까웠다. 조선이 억불숭유(抑佛崇儒)이긴 했으나 초기의 태조, 태종, 세종은 불심이 깊었다. 후기에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수원 근교로 이장하여 용주사를 세웠다. 이런 가운데 불교는 민중신앙으로 깊이 토착화 했다.
대한불교조계종을 상징하는 대표성은 종정(宗正)이다. 총무원장은 행정실무의 총책이다. 경찰이 지난달 29일 오후 4시 총무원장이 승용차를 타고 조계종 밖으로 나오는 차량 트렁크를 뒤졌다. 촛불시위 관련 수배자가 조계종 경내에 피신중이었던 것이다.
총무원장이 탄 차량을 검색한 것은 결례이긴 하다. 설마 수배자를 차 트렁크에 숨겨 빼돌리기란 만무하다. 수배자에게 피신을 허락한 것은 인도주의상의 일일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 됐다. 안 그래도 불교 폄훼설이 있던 차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화가 날만도 하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볼 수 없을까, 말단 경찰관의 검색은 소임에 충실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고사(古事)가 있다. 계포(季布)는 초왕 항우의 맹장으로 한왕 유방을 수차 사지로 몰아넣곤 했다. 그러나 유방은 초를 멸한뒤 계포를 중용했다. 계포의 행위는 당시 그의 소임에 충실한 것으로 보는 관용을 베푼 것이다.
감히 생각컨대 석가여래는 정좌사유(正座思惟)끝에 인과(因果)의 리(理)를 터득, 대각성도(大覺成道)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상사는 우연이 없는 필연의 법리란 것으로 안다.
대통령 이명박은 알다시피 장로다. 장로 대통령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불문(佛門)으로서는 섭섭한 일이 이상하게 자꾸 생긴다. 그러나 또 대통령과 가까우면 별 건가, 속인의 눈으로 보면 커보여도 영겁의 시공에서 보는 권력은 한 줌도 아니다.
권력이 불교를 홀대한다는 말보단, 불교가 권력을 가볍게 보는 눈이 중생들에게는 설득력을 갖는다. 권력과의 시비는 속설이기 때문이다. 권력과의 관계가 좋든 궂든, 어떻게 나오든 간에 일희 일비해가며 구애될 이유가 없다. 종도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고해에서의 중생 제도(濟度)가 아닐까.
/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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