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이운재 <수원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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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7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안컵 기간 중 대표팀 무단 이탈 및 음주 파문으로 물의를 일으켜 대표 자격정지 징계를 받으며 추락했다가 절치부심 끝에 지난 해 팀을 2관왕으로 이끌며 화려하게 부활한 이운재(수원 삼성)는 시즌 최우수선수(MVP)상 수상으로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MVP상 수상 뒤 “내가 많이 반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큰 상을 주시는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마음 고생이 심했던 이운재는 “20년 넘는 선수 생활동안 피땀 흘려 쌓아 온 것을 한번의 어긋난 행동으로 모두 무너져 가슴이 너무 아팠다”며 지난 2년을 회고했다.
대표팀 자격정지와 그 해 후반기 잇따른 벤치신세 전락으로 대부분의 축구팬들은 이운재는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축구를 사랑하는 진정한 축구인이었던 그는 지난 해 남해 동계 전지훈련부터 자신의 과오를 깊이 반성했다.
후배선수들보다 먼저 새벽 조깅에 나왔고, 밑바닥 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자세로 동계훈련 3개월 동안 초심으로 돌아가 오로지 운동만 생각하며 앞만보고 달렸다.
또 관내 주민센터 등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그 결과 지난 시즌 이운재는 39경기에 나서 29골을 내주며 평균 0.74점의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고, 통산 4번째 별을 가슴에 달며 K-리그에서 골키퍼로서는 처음으로 MVP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시련을 딛고 대한민국 최고의 골키퍼로 우뚝선 이운재는 “욕심이 있기에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꼭 하고 싶고 후배들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싶다”며 “프로는 경쟁의 세계이기 때문에 내가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할때까지 최선을 다해 뛸 것”이라고 말했다.
핸드볼 이민희 <용인시청>용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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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1월 제12회 아시아핸드볼연맹(AHF)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통산 10번째 우승컵을 안고 돌아온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주장 이민희(29·용인시청)는 10여년간 대표팀에서 오영란의 그늘에 가려 벤치를 지켜야 했지만 아시아선수권에서 전 경기에 출장해 우승을 이끌었다.
서울 장안초 6학년때 김운학 감독(용인시청)의 권유로 핸드볼을 시작하게 된 이민희는 휘경여중 1학년때부터 주전 골키퍼로 뛰면서 당시 전국 ‘최강’이었던 휘경여중·고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민희는 당시 실업팀 제일화재에 입단했지만 출전시간 보다는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실업 4~5년 차까지 벤치를 지켜야했던 이민희는 대표팀에는 일찌감치 발탁돼 태릉선수촌 생활이 벌써 10년째지만 정작 국제대회에 출전해서는 출장기회를 잡지 못해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민희는 운동을 포기하려고 했던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참고 또 참았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 뒤 위기 때마다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결국 2008 베이징올림픽 이후 한국 여자핸드볼은 늦어진 세대교체를 단행했고, 오영란의 은퇴로 이민희에게 대표팀 주전 골키퍼와 주장이라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20대 전후 어린 후배들이 합류하면서 이들을 이끌어야 하는 선배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이민희는 “최강 한국 여자 핸드볼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어린선수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준비할 것”이라며 “아직 노련미라든가 기술면에서는 부족하지만 워낙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보니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핸드볼을 시작하는 자세로 새롭게 출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레슬링 김광석 <수원시청>수원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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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120㎏급에서 오랜 방황 끝에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며 값진 금메달을 따낸 김광석(31·수원시청)은 울산의 화학공장에서 화학제품 폐기물을 치우는 일명 ‘화학공장 화장실 청소부’에서 일약 아시안게임 금메달 리스트로 부활했다.
지난 1994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문제 청소년으로 방황하던 김광석은 고등학교라도 졸업해 보자는 생각으로 울산 홍명고에서 레슬링을 시작했다.
하지만 레슬링을 시작한 지 1년만에 운동부가 해체돼 혼자서 다른 팀을 찾아다니며 훈련했고, 타고난 힘과 체력 탓에 경성대에 입학하는 행운을 안게된다. 경성대에서 처음 레슬링을 배우다시피 한 감광석은 대학 2학년때부터 그레코로만형 85kg급을 휩쓸며 지난 2000년에는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발된 유망주였다.
그러나 2002년 마산시청에 입단하면서 김광석은 어린 나이에 너무 큰 돈을 쉽게 벌 수 있게돼 흥청망청 돈을 쓰게 됐고, 자신감에 넘쳐서였던지 훈련을 게을리하고 술에 빠져 들고 말았다.
몸이 망가진 김광석은 스스로 매트를 떠난 뒤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해 2003년 한동안 울산공단에서 화학제품 폐기물 청소부로 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2004년 레슬링 매트로 복귀했다.
오랜 방황으로 그해 대통령배대회에서 1회전 탈락의 고배를 마셨지만 평소 재능을 안타까워 하던 수원시청 박무학 감독이 그를 발탁해 이듬해 수원시청에 입단, 이를 악물고 훈련한 끝에 2006년 아시아 1인자로 우뚝 섰다.
김광석은 “원대한 목표는 없다. 레슬링 선수로 생활한 것이 후회없도록 할 것”이라며 “올 시즌 세계선수권,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언제나 최선을 다한 멋진 선수로 후배들에게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최원재기자 chwj74@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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