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신례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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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생활에 처음 입문한 신참들의 신고를 받으면서 선배들이 작성한 문서가 ‘면신첩(免新帖)’이다. 인류학 혹은 민속학에서 통과의례로 이해되는 ‘면신례(免新禮)’의 역사는 깊다. 우리나라는 조선 중종 36년(1541년) 사헌부 상소에 면신례의 유래가 나온다. 고려말 조정이 혼탁한 시절에 처음 관직에 나간 권세가 자제들의 교만하고 방자한 기세를 꺾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갈수록 폐해가 커졌다. 오늘날 신고식과 달리 조선시대엔 모든 비용을 신참들이 대야 했다. 빚을 내서라도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리지 않으면 그 집단의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른바 왕따를 당했다.

18세기 신참 관리 정양(鄭暘)은 호된 면신례를 치렀다. 정양의 온몸을 숯검댕으로 만든 뒤 씻은 물을 마시게 했으며, 사모관대를 한 채 연못에 뛰어들어 고기잡이 흉내를 내게 했다. 심지어 얼굴에 오물을 발라 광대놀음을 시켰다. 그런 신고식을 다 치른 뒤 선배 3명이 정양에 대한 합격증을 내어주고 “신귀(新鬼·새로운 귀신) 양정(暘鄭)은 듣거라! 넌 별 볼일 없는 재주로 외람되게도 귀한 벼슬길에 올랐겠다. 전해 내려오는 고풍을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으니, 거위, 담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즉각 내어와 우리에게 바치도록 하라.”고 호통쳤다. 고참들은 정양의 이름을 일부러 ‘양정’이라고 거꾸로 불렀고, 거기에 ‘신귀’라고 하면서 희롱했다. “더러운 너를 거둬들이는 것은 우리가 천하의 도량을 가진 까닭이요, 너의 과오를 사면하고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성현의 큰 기량을 본받았기 때문이다.”라고 쓴 뒤 문건의 말미에 차례로 수결을 해준다. 이제는 ‘신참을 면하고(免新)’ 동료로 인정해준다는 의미다.

단종 시대엔 승문원에 배속된 정윤화라는 인물이 다른 9명의 신참과 함께 면신례로 사망한 일도 일어나 연루자 3명이 50대의 태(笞)를 맞고 파직되는 등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정국량(鄭國良)은 건융(乾隆) 23년(1758년) 초충(草蟲), 즉 풀벌레 같은 인사라는 모욕을 들어가면서까지 혹독한 면신례를 치른 뒤 ‘합격증명서’를 받았다. 면신례가 요즘은 대학가의 환영식으로 변질돼 신입생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었다. 과도한 대학 입학 신고식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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