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적 기개

조선조 영조 말 화가 성재(星齋) 최북(崔北)은 산수화와 인물화에 능통했다. ‘한국의 고흐’라고 불린다. 불우했던 삶도 비슷했고 고흐가 스스로 귀를 잘랐듯 최북은 스스로 한쪽 눈을 찌른 기인이었다. 최북의 예술가적 기개는 대단했다고 한다. 어느 날 양반집에서 그가 그림을 펼쳤다. 양반집 자식들이 그림을 보고는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네”라고 하자 최북은 “그림을 모른다고? 그러면 다른 것은 아느냐?”고 받아쳤다. 물론 그림은 팔지 못했다. 문신이었던 신광수(申光洙)는 최북이 사망하자 이런 詩를 남겼다. “어찌하여 최북이는 세길 눈 속에 묻혔는가 / 아아 그의 몸은 얼어 죽었어도 / 이름은 오래 사라지지 않으리”. 200여년이 지난 요즘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김홍도나 신윤복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고 있는 최북을 보면 신광수의 예언은 적중했다.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임제(林悌·1549~1587)도 뛰어난 예술가였다. 임제는 중화의식에 젖어 있는 조정을 비난했고 늘 나라를 걱정했다. 풍류를 좋아했던 임제는 서도병마절도사 부임차 평양으로 가던 길에 송도에 들러 황진이의 무덤에서 술을 한 잔 따르고 시조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임제는 이 시조로 인해 벼슬을 버렸다. 조정에서 임제의 행동을 두고 관리의 품위를 해쳤다며 상소를 해 스스로 물러났다.

조선 성종 때 높은 벼슬아치가 대궐로 행차하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길을 비킬 때 누더기를 입은 한 거지가 행차를 가로막고 벼슬아치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강중이 평안한가”. 그러더니 둘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벼슬아치가 입궐하자 다른 관리들이 조정 대신에게 반말 짓거리를 한 거지를 벌 주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벼슬아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만들 두게. 그 사람을 벌하면 뒷날 자네들 이름에 누가 될 걸세”. 벼슬아치는 대제학 강중(剛中) 서거정(徐居正)이고, 행차를 가로 막은 거지는 김시습(金時習)이었다. 둘 다 사는 형식은 달랐지만 당대의 시인묵객이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한다. 그들의 예술가적 기개가 그리워지는 세상이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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