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은 산에 엎드리며, 새는 공중에서 날고, 물고기는 물에 떠 있으나 사람이 가까이 가면 깜짝 놀라 흩어져 달아나지 않는 게 없다. 하지만 벌레는 그렇지 않아 모기는 한밤을 노리고, 파리는 대낮을 노려 휘장을 뚫고 주렴을 엿보면서 사람 피를 빨고 사람 땀을 핥는다.”
18세기와 19세기가 교대한 정조-순조 시대에 활동한 이옥(李鈺·1760~1815)이 쓴 ‘벌레에 대한 단상을 적은 소품’의 일부분이다. 소재가 이색적일 뿐만 아니라 표현 또한 해학적이다.
권력의 횡포에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이웃에 사는 네 아들을 둔 어미가 다섯째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계집종을 시켜 축하의 말을 건네니 그 어미가 발끈하며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고을에 군정(軍丁) 하나 더 보탰으니 관아 관리들이야 기쁘겠지만, 가난한 집엔 돈이 없으니 아들 보았다고 어찌 좋아하겠소. 큰 아이 세금은 200전, 작은 아이 세금은 50전, 만일 당일 아침에 바치지 않으면 관문에 잡아들입지요. 그 때문에 해가 다하도록 소금을 굽고, 일 년 내내 쟁기를 잡지만, 주려도 감히 곡식 한 톨 넣지 못하고, 추워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채 군포(軍布)를 마련하려 해 보지만 기일을 맞추지 못한다오.” 아들마다 세금을 매겨 관아에서 수탈해 가는 현실을 풍자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휴머니스트였다. 그의 또 다른 소품문으로 석굴에서 엽전을 주조하는 도적들을 다룬 이야기가 있다.
현재 경남 고성의 밤고개라는 산간에 석굴이 있었고, 그 안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위조하는 화폐 위조 전문 도적단이 있었다. 그들은 이 석굴 안에다가 철로(鐵爐)를 십여 개 나 갖춰 놓고 위조 동전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다섯째 아들을 낳았다고 기뻐하기는커녕 관아에 낼 세금 걱정부터 한 아낙네가 현실에 순응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반면, 동전을 위조해야만 했던 집단도 있었다.
이옥은 과거에서 장원을 하고서도 최종 심사에서 “문체가 불량하다”는 죄목으로 추후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당한 것은 물론, 지방 군적에 충군(充軍)으로 편입되는 처벌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옥은 굴하지 않고 문제작들을 계속 썼다. 이옥은 조선후기 이단의 꼭대기에서 선 문인이었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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