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소녀병

임양은 본사주필 ye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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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70여명의 학도병들이 화약에 심지불이 붙듯이 만세를 부르며 적병을 향해 쇄도해 갔다. (중략)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중략) 티 없이 청순한 젊음이 8월의 태양 아래 붉은 피를 토하며 쓰러져 갔다. 김용섭을 뒤따르던 소년이 뜨거운 피를 내뿜고 있는 중대장(필자 주석·김용섭)을 끌어 안았다. 그는 목덜미에 다발총을 맞고 피를 분수처럼 쏟아냈다. 소년은 “용섭 형! 형!!” 하며 울부짖었다. (중략) 윤재성·이상헌·김훈식·길안영·서성룡·정문호가 죽어갔다. 적의 시체 위에 학도병의 시체가 덮이고, 학도병 시체 위에 적의 시체가 엎어져 있었다. 시신조차 온전하지 않는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중략) 1950년 8월11일 새벽 4시에 시작된 전투는 71명의 학도병 가운데 김춘식외 47명이 포항여자중학교 앞 벌판에서 이렇게 산화했다.

 

이상은 ‘6·25와 학도병’ 책자에 쓰인 한 대목이다.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남상선(육군 예비역 대령)·김만규씨(목사)가 함께 썼다. 1974년 7월25일 서울 혜선문화사에서 발행된 367쪽짜리 책이다. 인용한 내용은 ‘학도병은 죽어서 말한다’편에서 나온다. 육군 3사단에 예속됐던 두 저자는 나덕자·나미옥 자매 등 여학생 학도병의 활약도 기술했다.

 

그러니까, 벌써 60년이 됐다. 학도병은 16~17세가 대부분이다. 즉 소년병이다. 소년병의 참전 사실은 외견상 18세 미만은 징집을 금하는 국제법에 저촉된다. 이 때문에 공식으로 인정되지 못했던 소년·소녀병의 병적과 활약상이 이제 한국전쟁 전사(戰史)에 기록으로 남게 됐다.

 

소년·소녀병은 징집된 것이 아니다. 지원병이다. 국방부가 6·25 참전 소년·소녀병의 실체를 인정키로 한 단안은 만시지탄이지만 정말 잘한 일이다. 전사한 이들이나, 살아있는 이들이나 응분의 예우를 해야 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6·25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 나라의 명운이 실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적에 펜 대신 총을 들고 나선 것이 학도병, 즉 소년·소녀 지원병들이다. 우리 국민이 오늘날 누리는 자유와 번영에는 이분들의 희생이 깔려있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임양은 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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