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작 홍사용’ 문학관 개관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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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 홍사용(露雀 洪思容·1900~1947) 선생은 192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일생을 낭만과 조선혼을 지키며 선비의 지조를 생활화하였다. 1922년 창간된 순문학 동인지 ‘白潮’의 동인으로 이상화·박영희·박종화·나도향·현진건 등과 활동한 노작은 소설, 희곡, 평론도 썼다. ‘개벽’ 동인으로도 참여했는데 ‘백조’ 폐간을 전후하여 극단 ‘토월회’, ‘산유화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40세를 전후해 출가하여 전국 사찰들을 순례하며 방랑생활을 했으나 다시 돌아와 서울 자하문 밖에서 한약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8·15 광복을 맞아 권국(權國)청년단 운동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7년 폐질환으로 47세의 생애를 마쳤다.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봄은 가더이다’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더욱 관심을 끄는 일은 수원시·화성시·용인시가 서로 노작을 자기 고장 출신이라고 자랑하는 점이다. ‘용인군지’(1990년)는 “홍사용은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천석군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노작으로 시인”이라고 적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용인 출생으로 아버지는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부위를 지낸 홍철유이며 생후 100일만에 서울 재동으로 옮겨 자랐으나, 아버지의 사망으로 화성으로 이사하여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곳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고 게재됐다. 노작은 8세 때 백부의 호적에 입적됐다. ‘화성군사’(1990년)에도 노작이 나온다. 1907년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먹실(불당골)로 이사를 와 살았기 때문이다. 1986년 편찬된 ‘수원시사’에도 노작이 등장한다. 노작이 유년기를 살던 동탄면 석우리가 당시엔 수원군이었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이 한 뿌리라는 얘기다. 수원시가 “노작은 수원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연유다. 1984년 5월26일엔 수원지방 문인들이 석우리의 노작 묘소 앞에 시비도 세웠다.

 

그런데 화성시가 동탄신도시 노작근린공원 경내에 건립한 ‘노작 홍사용 문학관’을 18일 개관한다. 27억원을 들인 지상 2층 규모다. 운영 계획도 다채롭다. 연고만 주장하던 수원시가 선수를 놓친 셈이지만 기대가 크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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