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관찰사(觀察使)는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되는 관직이다. 관찰사는 행정은 물론 지역 최고 군사사령관과 최고 재판관이기도 하였다. 삼권을 틀어쥔 절대 권력자였다. 특히 경기관찰사는 지방 행정구역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을 관할하는 직책이었다. 그래도 관찰사는 임금의 신하였다. 임금은 신하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관찰사는 원칙적으로 그 지역 출신자를 임명하지 않았다. 임기 또한 대체적으로 1년 이상 주지 않았다.
조선 왕조 건국 이듬해인 1393년 경기좌도와 경기우도 안렴사(安廉使·후일 관찰사)로 장자충과 임구가 임명된 이래 1908년 마지막 관찰사인 김사묵에 이르기까지 515년 동안 경기관찰사는 644명에 달했다. 역대 경기관찰사 중엔 최명길·홍봉한·채제공·김홍집·최익현 등 역사상 저명한 인물이 많다. 유철은 1647년, 1651년, 1653년, 1660년 네번이나 경기관찰사를 지냈다.
1540년 11대 임금 중종은 임백령을 경기관찰사에 임명하면서 “나무는 뿌리가 있어 자라 무성해지고, 물은 샘에서 흘러 바다에 이른다. 나라에 기전(畿甸)이 있음은 나무에 뿌리가 있고 물에 샘이 있음과 같다. 기전의 정치가 잘되고 못됨은 나라 전체의 무게와 관계되며 풍속이 순후하고 병든 것은 사방의 쇠퇴함과 융성함에 관계된다. (중략) 경에게 부탁하노니 부디 가서 직분을 잘 수행하라”고 교서를 내렸다. ‘기전’은 나라의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까운 행정구역이다. 오늘날 경기도에 해당된다.
경기도박물관이 지난 27일 개막, 5월 23일까지 전시하는 ‘경기관찰사 특별전’은 ‘경기관찰사에 부임하다’, ‘경기감영에서 경기도청으로’, ‘경기관찰사의 업무’, ‘기백열전’ 등 4부로 전시됐다. 경기감영도(보물 1394호), 채제공초상(보물1477호), 박문수초상(보물 1189호) 등을 비롯 유물 200여점이 과거를 회상케 한다.
6·2 지방선거에 경기도지사로 출마하려는 후보자들이 관람하여 조선시대 경기관찰사들이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지 예습했으면 좋겠다. 임백령에게 내린 중종의 교서 또한 가슴에 담아올 만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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