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동춘 서커스단은 역사가 꽤 깊다. 일본인의 서커스단 직원이었던 동춘 박동수씨에 의해 1925년 목포에서 창단됐다. ‘동쪽의 봄’이란 뜻을 가진 동춘은 일본 서커스단에서 독립, 조선인들로만 서커스단을 창단했다. 일제강점기에서 독립한다는 민족혼도 깃들어 있었다. 단원이 250여 명에 달했던 1960년대엔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TV가 없던 시절, 서민들의 최고 볼거리는 서커스였다. 그 시절 서커스단은 단순히 곡예만 보여주지 않았다. 마당놀이가 펼쳐지고 창극이 펼쳐졌다, 연극도 무대에 올랐다. 서커스단이 없으면 마당놀이패든 창극단이든 대중 앞에 설 수가 없었다. 지금의 대중문화는 서커스단 천막 안에서 성장의 틀을 움 틔운 셈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16개의 서커스단이 남녀노소를 울리고 웃겼다, 동춘 서커스단은 배삼용·이주일·허장강·장항선·서영춘·남철·남성남 등의 스타를 배출해내는 등용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집집마다 TV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서커스에서 멀어져 8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동춘 서커스단도 극심한 재정난을 겪어 왔다. 작년말 해체위기에 처한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서커스단의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특히 한국마사회의 도움으로 서울경마공원 내 주차장 부지에 상설공연장을 마련함으로써 떠돌이 서러움을 면케 됐다.
연중 무휴로 매일 3회 공연을 하는 동춘 서커스단이 무대를 5개월간 수원으로 옮겼다. 경기관광공사가 TV드라마 촬영장이었던 광장을 거의 무상으로 빌려준 덕분이다. 지난 1월 12일부터 수원 장안문 옆 넓은 공간에서 6월 12일까지 공연한다. 50여명의 단원이 오후 2시, 4시30분, 7시30분에 펼치는 진기묘기 곡예는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초대 박동수 단장, 2대 박영조 단장에 이어 현재 동춘 서커스단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서커스에 대한 열정 하나로 40년 가까이 동춘을 지켜온 박세훈 3대 단장이다. 서커스에 매료돼 고교 졸업과 동시에 동춘 서커스단원이 된 사람이다. 40대 이상이면 거리를 누비던 서커스단의 트럼펫소리를 들었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동춘 서커스단이 옛날을 회상케 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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