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부자(富者)의 대명사는 ‘경주 최부자’다. 흉년이 들면 최부잣집은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려고 곳간을 열어 양식을 나눠 주었다. 흉년은 부자들에겐 농토를 싼 값에 매입하는 좋은 기회이지만 최부잣집은 흉년에 절대 땅을 사지 않았다. 숙박시설이 여의치 않은 조선시대에 최부잣집은 수 많은 과객들의 쉼터였다. 노잣돈과 하루 양식을 챙겨 보냈다. 다른 지주들이 7할의 소작료를 받을 때 과감하게 절반만 받았다. 혁신적인 신농법을 도입하여 지주와 소작인 모두 함께 잘 살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최부잣집은 명문가다. 경주 최부잣집의 파시조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진립이다. 병자호란이 발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을 때는 69세의 노령에도 출전을 감행, 순국했다. 일본강점기 시절 최부잣집 장손 최준은 백산상회를 운영하면서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8·15 광복 후엔 400여년 간 모아온 전 재산을 영남대학교 전신인 계림대와 대구대에 기부했다. 최부잣집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전설처럼 이어진다. ‘부자의 조건’은 공익을 앞세울 때 더욱 회자된다.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빼 놓을 수 없는 욕망이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부(富)를 축적해야 부자반열에 오를 수 있는지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미국의 경우 현금과 부동산, 주식 등을 포함해 보통 총재산이 우리돈으로 20억원은 있어야 부자축에 낀다고 한다. 미국은 전체 가구의 10% 정도인 890만 가구가 백만장자다. 미국에서 백만장자의 기준은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제외한 순자산이 100만 달러가 넘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갈수록 소득 양극화가 이뤄져 중산층이 줄고 대신 부자와 서민들이 많아지는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은 재산 규모가 34억원이 돼야 부자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길리서치연구소가 최근 전국 성인 남녀 1천명에게 전화로 질문하여 알아낸 부자의 조건이다. 남의 집에서 셋방살이만 하지 않아도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34억원은 천문학적 액수이지만 부자의 조건을 높게 잡는 걸 허황된 꿈이라고 할 순 없다. 우리 사회에 최부잣집 같은 부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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