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실수

“법대가 그렇게 높아 보일 수 없더라”는 것은 변호사를 갓 개업한 어느 판사 출신의 말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이 그 법대에 앉아 재판을 했으면서도, 법대 밑에서 변론을 하는 입장과는 또 다른 소회를 가진 것이다.

 

하물며 재판을 받는 당사자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재판장이 무척 커보인다’는 것은 한결같은 피고인의 술회다. 예를 들어 정치 거물이라 할지라도, 무명판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데도 피고인이 되면 초조한 심정을 겪는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상정이다.

 

법정에서는 재판장이 왕이다. 검사도 법대 아래에 선다. 형사사건에서 검사는 이를테면 원고다. 자신이 기소한 피고인과 대칭되는 개념이다. 공소사실을 둔 이견 다툼은 검사나 피고인이나 대등한 권리를 갖는다. 이의 재판과정에 전권을 행사하는 것이 재판장, 즉 판사다. 가령 재판장이 검사나 피고인의 이의신청을 기각해도 더 할말이 없고 , 받아들여도 토를 달 수가 없다.

 

사법연수원 교육에 법정예절이라는 것이 있다. 주로 재판장의 위엄을 강조한다. 재판장의 질문에는 반드시 존댓말을 써야 한다고 돼있다. 그런데 법대 아래에 선 사람이 재판장을 향해 말할 땐 먼저 “존경하는 재판장님…”하고 ‘존경’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고 됐다. 굳이 나쁘다고 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존경할 수 없는 재판장들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판사가 민사소송에서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면박을 주는 예가 더러 있어 사회적 물의를 빚곤 했다. 형사소송에서도 젊은 판사가 나이든 피고인에게 반말을 하기도 한다. 재판장의 위엄을 상대의 인격이나 인권 폄훼로 높이려는 극히 일부의 이같은 판사는 가치관의 도착이다.

 

실로 황당한 것은 민사소송에서 법정 판결로는 승소한 사람에게 패소 판결문을 보낸 판사가 있었다는 점이다. 판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가 있을 수 있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아니다. 절대로 있어서도 안되고, 또 있을 수 없는 실수다. 왜냐면 ‘존경하는 재판장님’이기 때문이다. 판결문을 바꿔 보냈어도 법정 판결이 효력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재판은 법정에서만 갖는 기속력이 있다. 그러나 착오로 인해 소송 당사자에게 어떤 불이익이 파생됐으면 판사, 즉 국가의 책임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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