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1875~1965)에 대한 재평가가 태동되는 것은 다행이다. 조선조말 독립협회 간부로 개화운동에 투신, 경술국치후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거쳐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평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광복되던 그해 10월 귀국,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으로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엔 좌우 혼란기에 민주 진영의 최고 지도자로 활약했다.

 

독재자란 호칭은 그에게 씌워진 불멸의 멍에다.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희대의 날치기 국회 통과로 무려 4선을 내리 거친 자유당 독재는 1960년 4·19혁명으로 종말을 고했으나, 민주주의의 암흑기를 연출했다. 실각한 직후 떠난 망명지 하와이에서 5년만에 병사했다.

 

그러나 독재자의 과오가 뚜렷한 것과 마찬가지로, 공로 또한 뚜렷한 그의 업적을 과오를 빗대어 폄훼하는 것은 옳은 평가가 아니다. 광복전 그의 독립운동, 광복후의 건국운동도 큰 족적이지만 6·25 남침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한 업적은 절대적이다. 오늘날 나라가 있게 된 것은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유엔 등에 기민한 국방외교 수완을 발휘한 그의 기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는 그가 1910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론’이란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곳이다. 당시 프린스턴 대학 윌슨 총장이 1919년 민족자결주의 발표로 3·1운동의 도화선을 만든 미국 28대 대통령이다.

 

그런데 김종석 홍익대 교수 등 국내 동문들이 이승만 박사 학위취득 100주년인 올해 프린스턴대에 ‘이승만홀’ 설립을 추진한다고 한다. 아울러 강영훈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회장 등도 이에 나서는 등 지식인층의 참여가 확산되고 있다.

 

생각하면 건국 대통령을 폄훼하는 것은 우리의 자긍심을 스스로 짓밟는 불행이다.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도 완전한 사람이어서 미국민이 추앙하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 박사에 대한 과오는 과오대로, 공로는 공로대로 평가하는 새로운 역사관 정립이 절실하다. 프린스턴대의 ‘이승만홀’ 설립이 국내 동상 건립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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