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화·체계화해 농업경쟁력 강화… 잘사는 농촌 만들것”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정치인 유정복(53·재선·김포)에게는 항상 최연소라는 단어가 함께 한다. 37세 전국 최연소 군수(김포군수), 38세 전국 최연소 구청장(인천 서구청장), 41세 전국 최연소 시장(김포시장) 등 젊은 나이에 관선 군수가 된 뒤 2차례의 민선 시장을 거쳐 국회의원 이제 장관으로 발탁됐다.

박근혜 전 대표 비서실장으로 친박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당내 일부 친이(친 이명박)계로부터 미움도 샀다. 그런 그가 이명박 대통령으로 부터 장관직을 제의 받았다. 더욱이 총리후보 등 다른 후보자들이 야당의 거센 공격을 받은 것과는 달리 별다른 문제없이 여야 합의로 인사청문회를 통과됐다. 도농복합도시의 문제점을 잘 알고 해결한 것도 큰 보탬이 됐다. 경기도 출신 국회의원으로 장관에 임명된 유 장관을 만나 김포를 포함한 경기지역은 물론 한국 농수산업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희망을 듣는다.

억지로 역할 주어지는 것 아니다

 

- 최연소 타이틀을 세우며 단체장으로 승승장구하던 분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돌이켜보면 사람의 운명이란 것이 자의적으로 설정해서 목표를 향해 가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은 것 같다. 대표적인 게 저다. 이번에 입각문제도 생각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입장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다. 정치입문할 때도 그랬다.

 

- 민선 출마가 주민들의 잇단 요구 때문이었다는데.

김포가 고향도 아니고 태어난 곳도 아니고 학교도 다닌 적도 없고 출마를 할 이유가 없었다. 30대 때에 (1995년 6·27 지방선거 때) 연고도 없는데 출마하면 어떠냐고 얘기해서 구청장으로 피해갔다. 김포에 못있겠다고 생각하고 인천 서구청장으로 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김포 주민들이 찾아왔다. 데모대도 오고…인간이 살면서 이성으로도 살아가지만 감동으로도 살아간다. 재인 재경 향우회장들이 다 와서 그럴때는 제가 상당히 가슴이 뭉클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이렇게 원하는 게 있는 걸 안하면 두고두고 후회가 할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6월2일 사표를 내고 6·27 선거에 출마를 했다.

 

- 젊은 나이에 무소속 있었는데

공천을 신청해본 적도 없고 선거가 뭔지도 모르고 해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여당(민자당) 야당(민주당) 후보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얻었다. 대충 그때 분위기가 어땠는지 상상할 것이다. 정치입문의 특이한 케이스다.

 

- 이번 장관 임명도 특이한 케이스 혹은 의외라고 생각하나. 그전에도 이야기가 있었나.

이번 장관 임명도 그렇다고 할수 있다. 의외다. 사전에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저는 그런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단 됐으면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개인의 목적이 아니라 저에게 기대하는 많은 농어민들, 관련된 사람들, 국민들, 거기에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나쁜 사람된다. 그러니까 과정에선 내가 어떻게 판단하더라도 되고 나면 열심히 해야 한다.

 

- 처음 요청받았을 때 고민하지 않았는지.

8월8일 발표했는데 8월7일 일이 있어서 부산에 내려갔는데 연락을 받아 내가 할 사항이 아니다라고 사양했었다. 그런데 발표가 됐는데 구체적인 과정은 얘기하기 곤란한다.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서의 막중한 업무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과정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목발군수와 “내 사랑 김포”

 

- 재임기간 김포가 가장 역동적인 도시였던 것 같다. 도농복합도시로 많이 변했다. 기억에 남는 일은.

많이 있는 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비무장지대 유도의 황소 구출(1997년)이다. 세계적인 히트였다. 그 당시 정말 유명인사가 됐다. 그 해가 소의 해였는데 비무장지대에 떠내려온 소가 무인도인 유도에 살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뉴스였다. 제가 2탄으로 비무장지대의 유일한 섬인 유도에 남북한 방목장을 만들자고 했다. 5만5천평에 소 몇백두 들어가면 인간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깐 어마어마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이인제 지사도 무지 좋은 사안이라고 생각했으나 황소구출로 종결해버렸다. 아쉬움이 남는다. 정치적으로 구출로 종결됐지만 전세계적 관심이었고 세계 유일 분단국가의 비무장지대 소여서 독일에서는 초지를 다 대겠다고 할 정도로 화제가 됐었다.

 

- 시 승격에 크게 기여했는데.

당시 조윤형 내무부장관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원칙상 규정상 해석하면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유권)해석을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군 전체 인구가 15만을 넘거나 10만 이상이어도 가장 큰 읍의 인구가 5만이상이거나 도시적 산업집적사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45% 이상 넘을 것 등 조건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도시적 산업집적사업에 종사하는 인구와 비율을 도시계획구역내인구로 봐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켜켰다. 시가 됐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면 무슨 난개발이라고 하지만 군은 도시계획기본권한이 없다. 시가 돼서 제가 군수시절부터 준비하게 광역도시기본계획을 세웠다. 도시기본계획을 세워 그게 오늘날의 김포신도시가 된 것이다. 기본틀을 만들어 준 것이 보람이 된다

 

김포郡→市로 바꾼 것 보람

DMZ내 유도 황소 구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유통이 안정되고 살아나야

생산·소비도 살아날 수 있어

근본적 대책 마련할 것

농업을 희망으로 보자

 

- 현안으로 돌아오면 장관으로서 가장 급한 문제가 쌀 문제다. 북한지원 문제는 어떻게 되나.

국회에서도 말씀을 드렸는데 중요한 것은 국가정책이다. 정책의 일환이기 때문에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서 그 문제를 해야된다고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국민감정이라든지 다양한 생각 등 남북관계를 어떻게 할 지 큰 기조와 관계된다. 다만 정말 남북한 상황이 제가 편안하게 대북지원 얘기를 할 수 는 그런 상황이 됐으면 좋겠다. 쌀 재고문제가 대북지원의 결정적 목표가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남북관계를 개선발전시킨다는 측면하고 또다르게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해서 봐야 한다. 종전 농림수산식품부 입장보다는 상당히 유연한 자세로 접근하는 것이다.

 

- 한·미FTA보다 다가오는 한·중FTA가 농민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고 보는데.

그럴 수도 있다. 준비없이 FTA 파고가 밀어닥치면 견디기 힘들 수도 있기 때문에 본격적 협상 전에 충분한 사전협의가 필요하다. 민감한 항목인 쌀 비롯한 주요 농산물에 대해 적어도 합의점을 찾아 FTA 본격적인 협상으로 가야지 이 문제를 본테이블에 올려놓고 가게되면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협의를 충분히 하는 것으로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조사단이 구성됐다. 사실은 이번달에 북경에서 예정돼 있다. 충분한 사전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중국도 그런 부분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 중국의 농산물에 대한 우려는 상상 이상이다.

딱 한가지 덧붙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지켜봐야 하지만 너무 FTA, 특히 한·중간 FTA 문제를 큰 위기다 하고 수세와 방어적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농업이 맨날 이렇게 보조금 주고 가야만한다면 문제가 있다. 중국이라는 엄청난 시장은 농업의 새로운 시장, 신성장동력인 농업의 중요한 파트너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 소비수준이 계속 올라가고 고소득 소비계층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그런 부분을 감안해서 어떻게 전략적으로 대응하느냐 수출을 확대해 나가냐 공세적으로 가야지, 맨날 방어적으로 큰일났다 위기다 당장 농어민들 피해에 대해서 소득보전 해주는 것은 단기처방으로는 곤란하다. 흔히 ‘위기는 기회다’라고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준비해야 한다.

 

농업 변화 핵심은 유통과정 개선

 

- 농산물 산지가격과 소비자가격에 큰 차이가 있다. 고질적인 문제라고 하는데 유통 개선이 안되고 있다.

 

저도 관심이 참 많은 분야가 유통이다. 이렇다. 농산물이 갖고 있는 특수성 때문에 변화가 크다. 배추 무 등이 그렇다. 산지와 소비자간 단계별 유통시스템 구조도 상당히 복잡하다. 산지는 제값 못받고 소비자 비싸다고 생각한다. 결국 유통에는 작황이나 기후변화라든지 하는 외부적 요건과 구조적 요건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 문제는 제가 조금 전 T/F 1차회의 하고 막 왔다. 쌀은 쌀이고 농산물 유통문제를 근본적으로 대책을 마련하자고 했다. 농업부문에서 관행적으로 매몰돼 있던 시각을 탈피해봐야겠다. 공무원들에게 “서기가 되라”고 했다. 전문가들의 의견과 주위 의견을 모으라고 했다. 유통이 안정되고 살아나야, 생산도 소비도 안정되고 살아날 수 있다. 우리는 유통에 대해 특단의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책상에서는 안되는 게 너무 많다.

 

- 최근 수년동안 귀농에 대한 지원이 곳곳에서 이뤄졌다. 요즘 들어서는 귀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귀농·귀촌 다 맞물려 있다고 본다. 농촌문제를 분리시켜 투트랩으로 봐야 한다. 하나는 농업 문제이고 하나는 농촌 문제다. 공동체 사회에서 사회의 균형을 보장해주기 위해 정부가 노력해주고, 복지적으로 접근하고, 농업경쟁력은 따로 가야 한다. 농업경쟁력은 구조화·조직화·체계화·경영화 해야 한다. 농촌 경쟁력 강화시키기 위한 대책마련을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나 새로운 시각에서 펼쳐놓고 접근해보고, ‘안되는 것 배제하는 정책방식이 아니라 되는 것 되게 하는 정책방식’이 필요하다. 농촌 문제는 어렵지만 아니갈 수 없다. 귀농·귀촌 문제도 돌아와서 확신을 심어주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 수산 분야 대책은.

수산분야 홀대론이 있더라. 제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다. 첫 방문지로 노량진 수산시장을 갔다. 농업도 어렵다고 하는데 수산분야가 어렵다. 세계적으로 어족자원 고갈에 따른 대비, 해양생태계 변화, 원양어선도 비교우위에 있었는데 지금 상황은 그렇지 않다. 중국이란 어마어마한 상대가 달려들고 있다. 3면 바다, 세계 5대 갯벌, 양식업 세계적인 수준이므로, 다수확의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가야한다. 잡는데 따른 고비용, 규범과의 마찰 그래서 기르는 어업으로 변하는 데 워낙 우리가 재주가 좋으니깐 수산업 분야도 가능성이 있다. 농담같은 이야기인데 중국사람들이 다 튀겨 먹는데 최근 회를 먹기 시작했고, 13억 인구가 회를 먹기 시작하면 인류의 바다의 재앙이 올 것이라는 말이 있다(웃음). 우리가 공급처가 돼야 한다. 우리가 빨리 앞서나가야 한다. 수산분야도 낙심한 일이 아니다.

 

대담=최종식 정치부장·정리=김재민기자 jmkim@ekgib.com

 

약  력

▶1959년 인천출생 ▶행정고시 합격 ▶ 김포군수(전국 최연소 군수) ▶인천 서구청장(전국 최연소 구청장) ▶초대·2대 김포시장 ▶ 17·18대 국회의원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젊은 시절 목발 짚고 현장 누벼

 

주민들 ‘목발군수’ 애칭으로 불러

 

유정복 장관은 ‘목발군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유 장관은 관선 김포군수로 부임한 지 3개월만에 면민들과 축구를 하다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목발을 한 적이 있다.

 

“그게 94년도 이야기인데요. 일요일마다 축구를 하는데 제가 젊은시절 축구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축구를 잘한다.(웃음) 4월1일이니깐 3개월 됐나 새벽에 축구를 하러 가보니깐 30분전 1시간전에 다나와 몸풀고 스텐바이하고 있더라구. 그러니까 어떻게, 나는 가자마자 공차는 거지. 그러다 인대가 끊어진거야. 여기 아킬레스건(인대를 가리키며)이 그대로 끊어졌다”고 말했다.

 

인대 70% 손상으로 6주간 기브스에 목발을 집고 다녔다고 한다.

 

“뻥 소리가 나서 처음엔 옆에 테니스 치는 곳에서 공이 넘어왔나 보니깐 내가 발이 좀 이상한 것 같애. 아퍼. 곁질린 줄 알았어. 검단이었는데, 일요일날 아침, 병원 문은 닫았고 군에서 병원 원장을 나오라고 해서 발에 손을 넣어보니깐 손이 쑥 들어가더라구. 얼마나 기가막히겠어. 신체가 얼마나 오묘하냐면 6주를 기브스 하고 보니깐 아무 이상없는거야”

 

그런데 목발을 집고 다니던 중에 마침 월곶에 레미콘 공장 문제로 주민들의 데모가 일어났다.

 

군이 허가를 안내주자 도에 행정심판을 제기해서 군이 지면서 허가를 내주었다. 농민 반대데모가 이어졌고 급기야 국도를 막으면서 이 일대가 마미됐다.

 

유 군수는 서울의 한 언론사에서 지방자치단체장 대표로 지방자치단체 좌담을 하고 있다가 연락을 받고 시골길을 이용해 겨우 도착한 뒤 20~30분 설득을 해서 국도 점거를 풀게 했다. 목발을 짚은 군수의 열정에 농민들이 이해를 해 주었다. 당시 목발을 집고 데모현장에 나타났던 유 군수의 모습은 본보에 게재되기도 했다.

 

유 군수는 이후에도 민원현장에 어김없이 목발로 나타나면서 주민들은 젊고 열정적인 유군수를 ‘목발군수’라 불렀다.  김재민기자 jmk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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