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 직권상정’이라는 공식용어는 없다. 다만 국회법 제85조 2항에 법안심사 기간 등에 대해 ‘위원회가 이유 없이 그 기간 내에 심사를 마치지 아니한 때에는 의장은 중간보고를 들은 후 다른 위원회에 회부하거나 바로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을 편의상 국회의장 직권상정이라고 부른다. 이 조항이 바로 문제다.
상임위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안건마저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본회의에 바로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권한이다. 본회의에 상정되고 나면 다수 의석을 점한 집권당이 밀어붙이기로 쟁점들을 처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직권상정은 군사정권 때 도입됐지만 실제로 활용된 것은 그 이후다. 직권상정은 1973년 9대 국회 때 처음 도입됐다. 하지만 11대 국회 때까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 직권상정은 1985년 4월11일 시작된 12대 국회부터 평균 1년 반에 한 번 정도 나타났다. 첫 직권상정은 1985년 12월17일로 당시 이재영 국회의장이 방송법 등 11개 법률안을 본회의에 직권상정했고, 법률안은 모두 처리됐다. 18대 이번엔 박희태 국회의장이 내년 정부예산안과 예산부수 법안 외에 상임위 논의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은 10개의 일반법안을 직권상정해 물리적인 충돌을 거쳐 한나라당이 단독 처리했다.
국회에서 골치 아픈 법안이나 예산처리가 직권상정으로 통과된다면 각 상임위가 필요없다는 얘기다. 직권상정이 ‘전가의 보도’처럼 악용된다면 결국 국회가 입법부의 고유 권한을 포기하고 스스로 청와대의 하수인 역할을 자초하는 셈이다. 한나라당 역시 야당시절엔 직권상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특히 이재오 특임장관은 2006년 야당 원내대표시절 직권상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국회법’을 개정하겠다’고 공개선언했었다. 하지만 지금 한나라당의 중심 세력에 있는 이 장관이 직권상정을 반대했다는 얘긴 아직 못 들었다.
직권상정은 국회의장 1인이 위원회보다 훨씬 더 많은 권한을 갖고 있는 왜곡된 정치 행위다. 미국 등 의회 선진국에도 없는 제도다. 국회의장을 대통령의 한낱 하수인으로 추락시키는 제도다. 18대 국회에서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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