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공부 병행 끝 사회복지사로 제2인생

나는 이렇게 취업했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 탓에 18세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공장일, 경리직, 사무직 등등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살았고, 스물여덟이 되던 해 결혼을 했다.

 

그러나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자 무언가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단출한 이력서를 이곳저곳 내보았지만 예전처럼 취업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일용직을 전전하는 동안,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꿈이 문득 절실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조부모님 밑에서 형제도 하나 없이 커야 했기에 늘 외로웠던 어린 시절, 어른이 되면 나처럼 소외받고 외로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선생님이 되는 모습을 늘 그려 왔었고, 그 꿈은 수십년 동안 사라지지 않은 채 희미하게나마 내 가슴에 살아 있었던 것이다.

 

방송통신대학에 입학원서를 넣고 가정 형편으로 인해 중단했던 공부를 하기 위해 매일 밤마다 펜을 들었다. 어떤 날은 코피가 쏟기도 했으며, 아이들에게 신경을 못 써 주는 나쁜 엄마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까지 들었다. 가시밭길처럼 힘든 4년여를 노력한 끝에 꿈에도 그리던 대학 졸업장을 받았고, 곧이어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하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다. 많은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면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기 일쑤였다. 경기도는 물론이고 서울이며 인천까지도 이력서를 들고 뛰어 다녔다.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 두 아이의 엄마라는 무거운 책임마저 잠시 내려놓은 채 달려왔거늘 몰라주는 이 사회가 미워지기까지 하면서 점차 의기소침해지고 자신감도 잃었다.

 

“엄마,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면서 뜻을 포기하면 어떡해? 그럼 길도 사라지는 거잖아.”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딸아이가 한껏 어두워진 엄마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런 아이에게 부끄러워 나는 다시 이력서를 쓰고 부지런히 이곳저곳 뛰어다닌 덕택에 나는 꿈에도 그리던 사회복지사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오늘도 딸아이보다 더 설레는 마음으로 딸아이의 교복과 함께 나의 블라우스를 다렸다.

 

꾸러기아동센터, 매일매일 밝고 맑은 아이들의 눈망울 속에 파묻혀 사는 그곳은 내게 직장 그 이상이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소통하며 아이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간절히 원하고 또한 최고보다 최선을 다하는 값진 땀방울을 흘린다면 취업 성공은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꾸러기아동센터 사회복지사 안현주씨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