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자유수호”···21개국 참전용사 빛나는 희생정신

6·25 60주년 특별기획/UN참전비 순례<1>오산 UN초전 기념비

“유엔 안보이사회는 북한군대의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평화의 파괴행위로 규정하였으며, 북한당국에게 전투를 즉각 중지하고 그들의 군대를 즉시 38도선으로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였으며, 유엔한국위원단으로부터 북한당국이 전투를 중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군사적 조처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대한민국이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효과적인 조처를 즉각 취하여 줄 것을 유엔에 호소하였음을 감안하여, 대한민국이 무력침략을 격퇴하고, 그 지역에서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여 줄 것을 유엔회원국에게 권고하는 바이다.” -유엔군 즉각 참전 결의문 (1950.6.28) 중에서

 

자유수호의 성지, 죽미령

6월 3일 유엔군 최초의 전투인 ‘오산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엔군 초전비’를 찾아가기 위해 10여 년째 관리를 맡아오고 있다는 대한민국무공수훈회 오산시지회를 방문했다. 전쟁 관련 흔적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기자를 보며 참전장교 출신인 황용석 지회 사무국장(83)이 안내를 자청했다.

 

국도 1호선을 따라 오산에서 병점 쪽으로 가다보면 옛 죽미령 고개에 이르러 왕복 4차로 옆 좌측 소나무 숲속에 돌로 쌓아 놓은 듯한 높이 4m 정도의 조그마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시멘트 좌대에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이 비석에는 ‘유엔군 초전 기념비’라는 영문과 한글 문구가 세겨져 있다.

 

비석의 주인공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참전 승인을 받은 미국이 전쟁 발발 뒤 처음으로 한반도에 파견한 미 제24사단 21연대 1대대(스미스 특수부대)였다. 미 제24사단이 1955년 7월 5일 건립한 것으로 이듬해인 1956년 미 제24사단이 유럽으로 옮겨감에 따라 오산시가 관리를 맡아 오고 있다.

 

유엔군은 1950년 6월 27일 미국을 시작으로 그리스, 남아공, 네덜란드, 뉴질랜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영국, 이디오피아, 캐나다 콜롬비아, 태국, 터키, 프랑스, 필리핀, 호주 등 16개국에서 연인원 200여만명이 참전해 4만여명 전사하고, 10만여명이 부상했다. 또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인도 등 5개국은 3천100여명의 의료진을 보내왔으며, 브라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쿠바 등 20개국은 물자를 지원해왔다. 이들은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코리아’라는 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기 위해 희생했다.

 

초전비를 마주하고 도로 건너편에는 미국을 비롯해 전투병력을 파견했던 16개국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경기도는 1982년 4월 6일 1만6천여㎡의 부지에 다소 왜소한 구초전비를 대신해 새롭게 초전비를 세웠다. 전투 당시 3개의 진지를 구축했던 상황을 상징하기 위한 19.5m 높이의 3개의 비신(碑身)과 치열한 격전상황을 표현한 동상이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황 사무국장은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자유수호를 위해 고국을 떠난 스미스 특수부대 장병 가운데 181명이 산화한 곳이 죽미령”이라며 “자유와 민주를 위해 그들이 생명을 바친 죽미령은 세계평화를 위한 성지임에 틀림없다”라고 강조했다.

 

오산시와 주한미군도 미 재향군인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매년 7월 5일 기념비 일대에서 유엔군 초전 및 스미스 특수부대 전몰장병 추도식을 갖는다.

 

고지 전방으로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고 있어 전투지역 일부가 훼손된 것이 한 가지 아쉬운 점으로 남았으나, 오산시가 이 일대에 전쟁기념관과 유엔참전 조형물을 갖춘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있어 60년전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린 유엔군의 희생을 기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오산전투는  ‘오산전투’는 유엔군이 북한군과 벌인 첫 전투.

 

1950년 7월 5일 새벽 3시. 한국전쟁에 최초 파병된 미 제24사단 21연대 1대대장 찰스 B. 스미스 중령은 B·C중대와 사단 52포병대대 AVH대의 장병 540명과 함께 죽미령 고개에 포진했다. 이날 오전 7시. 북한군 전차의 남진을 목격한 스미스 중령은 8시 15분경부터 포병사격 실시를 명령했다. 그러나 방어 태세가 완벽히 이뤄지지 않은데다 북한군 전차대가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전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후방이 차단되고, 북한군 병력이 지속적으로 내려오자 결국 안성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150여명의 전사·실종·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초탄 발사시부터 철수시까지 6시간 15분을 지연시키며 미 제24사단 주력이 전투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성과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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