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의 세월을 품은 군포 동래정씨동래부원군파 종택
수리산 초입에서 갈치 저수지가 낮게 펼쳐진 삼거리를 돌아 들어가면 돌과 흙, 기와가 올려진 고풍스런 담장이 보인다. 담을 뚫고나온 굵은 고목이 지난 세월을 말해주는 듯 하다.
집안에 들어서자 마당 가득 피어있는 맨드라미며 백일홍, 옥잠화, 무궁화 등 온갖 꽃들이 손님을 맞는다.
군포시 속달동 수리산 자락에 위치한 동래정씨동래부원군파 종택(경기도문화재자료 제95)은 조선조부터 유학자 집안으로 삼정승(三政丞)을 무려 17명이나 배출한 유서깊은 가문이다.
가문의 위세에 비해 종택은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런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종택은 조선조 문신인 정난종의 큰 아들 정광보가 들어와 살며 지은 집으로 500년이 넘는 나이를 자랑한다. 맞은편 언덕에 자리잡은 아버지의 묘역을 날마다 바라보며 살고 싶었던 걸까.
이후 종택은 정씨 후손이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사는 근거가 됐다. 종택 일대는 사패지(賜牌地, 고려·조선조때 임금이 국가에 공을 세운 왕족과 관리에게 주는 토지)로서, 가문의 파시조(派始祖)인 동래군(東來君) 정난종(鄭蘭宗, 1433~1489년)선생묘 및 신도비 외 묘역일원(경기도기념물 제115호)이 자리하고 있다.
종택의 사랑채는 고종 14년인 1877년에 지어졌고, 대청마루 종도리에 일부 남아 있는 상량문에 ‘성상즉위칠년(聖上卽位七年)’이라고 적힌 점으로 미루어 안채는 사랑채보다 100여년전인 1783년(정조 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건물. 초당과 외양간은 6·25전쟁때 소실되고, 사당은 1960년대에 훼손됐으나 최근 복원했다. 방앗간이 있던 바깥 행랑채는 1970년대에 무너졌으나 복구작업을 거쳐 현재는 아담한 종택의 면모를 뽐내고 있다.
가옥 구조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튼ㅁ’자 형태의 서북향 집이다. 안채 ‘ㄱ’자형 9.75칸, 큰사랑채 ‘ㄴ’자형 13.5칸, 작은사랑채 ‘-’자형 4.5칸, 광채 ‘-’자형 5칸, 마방채 ‘-’자형 4칸 규모이다.
사랑채는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큰사랑채는 전면 5칸으로 구성된 전후 툇집으로, 누마루, 마루복도, 행사청 등 평면 구성과 칸의 구성이 독특하여 기능을 중시하는 조선 후기 살림집의 변화를 보여 준다. 현재 동래군파 17대손인 정운석(98)씨가 소유하고 있으며 차남인 정준수씨가 관리하고 있다.
8월 12일 오전, 오락가락 하는 소나기를 피해 찾아간 종택에서는 박숙현씨(64)가 마당에 자란 잡풀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박씨는 “은행에 다니며 도시생활에 익숙했던 제가 스물아홉에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종가집에 시집온 지 벌써 30여년이 넘었다”며 “이 집은 제게 가보를 잇는 종택보단 자식 넷을 줄줄이 키우고, 남은 여생 남편과 함께 소박하게 살고픈 보금자리”라고 소개했다.
박씨는 종부가 아닌, 집안의 둘째 며느리라고 했다. 큰 며느리를 대신해 종택을 지키며 1년 제사만 기제사(忌祭祀), 시향(時享)에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제사까지 10여회가 넘는 제사를 치러내고 있다.
“시집와서 보름만에 시어머님이 돌아가셨죠. 집안 살림도 파악하지 못한 제게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지만, 동네 아주머님들이 종가집 살림을 걱정해주고 챙겨주시는 덕에 명절때면 앞 마당이 꽉 찰 정도로 손님이 오고갔죠. 전 지지는 냄새가 담장을 타고 넘어가면 그날이 바로 동네 잔칫날이었어요.”
250여명이나 되는 종친들과 이웃주민들이 명절때만 되면 종택에 모여 각자의 기복을 빌고, 조상께 예를 다했다는 종갓집 명절 분위기는 요즘엔 보기힘든 풍경이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현대판 며느리들에게 군불때고, 쪼그리고 앉아 하루종일 전을 부치고, 땔감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일년내 묵힌 장으로 구수한 토장국을 끓이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버거운 일인게 사실. 그러나 고향을 찾을 아들, 딸들에게 싸 줄 것들을 챙기는 분주한 손길은 종가뿐 아니라 여느 여염집이건 다름없는 명절 풍경이다.
박씨는 “비싸고 좋은 물건을 한상 가득 차려내는 것만이 조상에 대한 예절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가족들끼리 한 데 모여 밥 한끼 나누는 것이 바로 명절의 참모습”이라는 박씨의 ‘종가의 가르침’이 마음에 와닿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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