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현장을 찾아서

하얼빈서 이토우 히로부미 저격···100년 흘러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우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00년이 흘렀다.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의사의 의거는 조선과 중국과 러시아가 협력해 일본의 침략을 저지, 동양평화를 이룩하고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이어지는 세계평화체제 구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경기일보 과천자사 자문위원회는 지난 6월24~27일 안 의사의 의거 현장을 탐방했다.

 

◇일본의 침략야욕을 경고하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러시아와 맞닿은 중국의 변방 도시 기차역 플랫트폼은 러시아제국 군악대와 의장대, 청나라 군대, 일본 관리와 러시아 관리 등 수백명이 운집해 있었다.

 

특별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정치 거물은 의장대 사열을 받으며 거만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때, 갓 서른을 넘긴 검은색 양복 차림의 훤칠한 조선 청년이 러시아제국 군대 뒷편에서 권총을 꺼내 발사했다.

 

“탕~탕~탕~” 플랫트폼에 모였던 군중은 비명들을 지르며 흩어졌고 일본의 정치 거물은 고개를 떨궜다.

 

조선 청년은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 대한국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100년 전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당시 추밀원 의장)를 저격한 의거는 이렇게 시작됐다.

 

청일전쟁(1894~1895년)과 러일전쟁(1904년) 등으로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던 시점에서, 조선의 본격적인 무장독립투쟁을 예고하는 총성이었다.

 

◇100년 지난 의거현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2010년 6월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 플랫트폼. 시간만 1세기만 흘렀을뿐, 다롄(大連)역을 출발해 밤을 꼬박 세워 달려온 열차가 토해낸 승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등 ‘그날’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열차에서 내려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인파들 사이를 비집고 제복을 갖춰 입은 여성 열차 승무원들도 100년 전 그때처럼 일렬 종대로 대오를 이룬 채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들었던 현장이 보였다. 보도블럭에 엷은 자주색 페인트로 사격방향을 알려주는 마름모 형태의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6년 전 중국 당국에 의해 뒤늦게 표시된 역사의 흔적이었다.

 

낯선 타국에 우리의 독립투쟁 현장이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숱한 중국인들이 슬쩍슬쩍 곁눈질을 하며 지나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북방의 햇볕은 따가웠다. 안 의사는 의거 직후 하얼빈시 화위엔졔(花園街) 351호에 위치한 옛 일본영사관으로 압송된 뒤 다롄역을 거쳐 뤼순으로 압송됐다.

 

다롄역은 검은 연기를 뿜어대던 증기기관차가 디젤기관차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그동안 강산이 열차례나 바뀌었는데도 예전과 거의 비슷했다.

 

◇타국의 하늘 아래에서 독립을 염원하며

 

중국 북방의 해양도시 뤼순의 하늘은 구름 한점 없었다. 이곳의 정확한 행정구역 명칭은 다롄시 뤼순코우치(旅順口區). 청년 안중근이 재판을 받았던 관동주법원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롄시 뤼순코우치 황허루(黃河路) 베이이강(北一巷) 33호가 정확한 주소. 안 의사는 관동주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뤼순감옥으로 옮겨졌다.

 

러시아는 18세기 이후 이 도시를 장악한 뒤 정치범들을 위한 형무소를 조성했었고,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이 일대를 확보한 뒤 이미 설치된 러시아 감옥을 증축했다. 다롄시 뤼순코우치(旅順口區) 상양졔(向陽街) 139호에 위치한 뤼순감옥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완공됐다.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라고 쓴 푯말이 이방인들을 맞고 있는 뤼순감옥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청년 안중근은 이곳에서 4개월 정도를 보낸 뒤 1910년 2월14일 순국한다.

 

◇안중근 의사와 칸트의 평화론

 

청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유는 명쾌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 명성황후 살해죄와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등을 천명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이 모든 죄는 결국 동양평화 파괴로 귀결된다.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과 중국 등 동양의 평화가 깨졌고 러시아 등을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참상이 조선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를 지키고, 뤼순에 한·중·일 3국이 참여하는 동양평화회의를 설치하며, 3국 공동 은행을 창립해 공용 화폐를 발행하고, 3국 청년들로 공동 군대를 편성하며 상대방 언어를 교육하자는 게 그의 동양평화론이다.

 

이같은 사상은 독일의 비판 철학자인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일맥 상통한다. 칸트의 ‘영구평화론’ 핵심은 공화제와 평화로 압축된다.

 

칸트는 전쟁 방지를 위해 국가 간 조약으로 평화연맹을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청년 안중근도 모든 국가들이 자주독립을 실현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군사·재정적 권력을 공유하는 평화회를 조직하고 뤼순을 거점으로 삼자고 주창했다. 그의 평화론은 1세기가 흐른 지금도 유효하다.

/탐방단=이승규 경기일보 전무이사, 전봉학 경기일보 과천지사 자문위원회 위원장, 곽흥섭 위원, 정재훈 위원, 이종길 위원, 박성일 위원, 허행윤 기자, 김형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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