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패권주의는 자국문화의 세계화로 공자(BC 552~479)를 내세우고 있다. 마오쩌둥의 거대 초상화가 내걸린 베이징 천안문 경내는 아니지만, 초상화가 마주 보이는 건너편에 공자의 청동상이 건립됐다. 동상은 기단 높이 1.6 m에 신장 7.9m로 높이가 9.5m에 이른다. 마오 초상화 너비 4.6m 높이 6m보다 훨씬 크다.
지난 11일 낙성식을 가진 공자의 동상이 마오가 있는 천안문 안이 아니고 좀 벗어난 국가박물관 북문 광장에 세워진 것은 마오 생전의 ‘비림비공운동’ 때문이다. 정적 임표와 임표가 옹호한 공자사상을 싸잡아 배척한 것이 ‘비림비공운동’이다. 마오를 따랐던 홍위병들은 대륙에 산재한 전국의 공자 사당을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매도하며 불지르는 등 모조리 박살냈다. 이토록 1960년대부터 마오가 죽은 1976년까지 모질게 박해를 가했던 공자에 대해 수년전부턴 복고풍이 불더니, 이젠 그의 동상 건립으로 완전히 복권됐다.
중국 춘추시대의 철학자로 유가(儒家)의 비조를 이룬 공자는 지금의 산동성에 자리잡았던 노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가난 속에서도 학문에 뜻을 세워 인(仁)을 바탕으로 한 이상정치를 구현하려고 관리가 됐으나, 반대파의 모함을 받고 국외로 망명해 육국을 섭렵했다. 말년엔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사서삼경은 그의 학문이다. 동양 삼국의 정치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
‘모르는 게 사람의 일’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르는 게 역사 일 수도 있다. 마오 사후 35년만에 공자가 마오 초상화보다 더 거대한 청동상으로 마오 앞에 나타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것도 ‘비림비공운동’의 본거지로 백만 홍위병들이 돌아가며 공자를 저주했던 천안문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컬 한 일이다.
중국은 서구문화의 대항마로 내놓을 공자의 자국문화 콘텐츠 개발이 한창이다. 공자사상을 중화사상의 모태로 삼고 있다. 잘은 몰라도 언젠가는 중국에서 마오쩌둥 격하 운동도 벌어질 수 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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