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梅)·란(蘭)·국(菊)·죽(竹), ‘사군자(四君子)’에 정감이 가는 것은 옛 문인들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온 까닭이다. 눈(雪) 속에 매화를 찾아다녔다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이나, 국화를 심고 이를 가꾸며 유유자적했던 진나라 때의 도연명, 대나무 없는 곳에선 살 수 없다고 했던 왕휘지 등의 고사는 널리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매화시 60여 수로 ‘매화시첩’을 엮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이황의 매화 사랑이 유명하다.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名妓列傳)’을 보면, 이황이 매화의 기품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또 19세기 화가 조희룡은 매화시를 읊고 매화차를 마시며 사는 곳도 매화시 백 수를 읊는다는 뜻으로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이름 지었다.
사군자는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현재 5만원권 지폐 뒷면에 실려 있는 ‘월매도’는 조선시대 최고의 매화 화가로 불린 어몽룡의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그림은 굵고 곧은 매화 줄기가 오랜 풍상을 겪은 듯 모두 끝이 부러져 있고, 가지는 기운차게 뻗어 올라 잔가지에 듬성듬성 매화꽃과 봉오리를 달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不二禪蘭)’이 난초 그림을 통해 초탈의 선(禪) 경지를 표현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추사로부터 난 그림을 배운 흥선 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역정에 따라 심상을 반영하는 필법을 구사하며 개성적인 작품 세계를 가꿨다. 조선 말기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서 민씨 세도정치의 중추세력이었던 민영익은 대표작 ‘노근묵란(露根墨蘭)’을 통해 시대에 대한 울분을 분출했다.
정조대왕의 국화 그림 ‘야국(野菊)’은 담백하면서도 간결하게 그려진 국화와 풀벌레의 재치 있는 표현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문예부흥을 주도해 나간 군왕의 지혜가 엿보인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전환되는 시기에 살았던 문인화가 신위는 묵죽(墨竹)에서 당대고금을 통하여 짝할 사람이 없다는 극찬을 들었다. 그가 72세에 그린 ‘죽석도(竹石圖)’는 죽기 직전까지 선비의 기품을 간직하려 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매화·난초·국화·대나무가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군자’라는 이미지로 자리 잡은 데는 사군자를 읊은 시문(詩文)과 그림, 사군자화(四君子畵)의 영향이 크다. 한파 속 설중매의 개화가 기다려진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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