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아침
온 동네가 가난을 식구처럼 껴안고 살던 시절
언니와 나는 일수 심부름을 다녔다
우리 집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일수(日收)
월곡동을 지나 장위동을 거쳐 숭인동까지
카시오페아좌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다섯 집을 다 돌면
일수 수첩 사이에서 돈의 두께가 부풀어 오르고
내 가슴에도 도장밥 빛깔의 별들이 철없이 떠올랐다
일수 수첩 속에는 각기 다른 여러 겹의 삶들이
붉은 도장의 얼굴을 하고 칙칙하게 접혀있었다
어느 날 추위를 툭툭 차며 집에 도착했을 때
‘벌써 갔다 왔니?’ 하던 엄마의 이마에 송송
맺혀있던 땀방울과 아버지의 헝크러진 머리칼과
파도처럼 널브러진 이불, 들킨 건 나였다
아무 것도 못 본 척 문을 닫고 나오던 내 뒤통수를
쌔리며 사춘기는 내게로 급하게 휘어들었다
삼십 대 후반의 젊은 부모에게
꼭 묶어두어도 터져나오던,
때론 밥생각보다 더 절박했을,
한 끼의 섹스가 가난한 이불 위에
일수 도장으로 찍혀있던, 겨울 그 단칸방
언니와 나는 일수 심부름을 다녔다
제정러시아 때라던가, 혹독한 추위에 천지가 다 얼어붙은 시베리아 벌판으로 유배된 남녀가 눈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살다 결국 얼어 죽었다는데 그 절체절명의 시간이었을 그곳에서 섹스의 흔적이 발견되었단다. 확실히 생(性)은 모든 생명의 기본 단위인 밥과 같은 항렬이거나 그보다 우선한다. 호기심에 찬 어린 눈알들이 또륵또륵 굴러다녔을 단칸방에서 언제 생겼는지, 한 집에 예닐곱씩 터져 나오듯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 없던 시절에도 건강했다. 그러니 틈틈이 짬짬이 성(聖)스런 일수 도장을 찍던 부모도, 그 후 천천히 먼 길을 돌아서 일수 심부름을 다녔을 어린 시인도 모두 모두 장하다. <이덕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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