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여성들에게 한국사회의 법과 제도는 큰 힘이 되지 못한다. 되레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기 일쑤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밝힌 2010년 성폭력 피해여성과의 상담사례는 충격적이다. 피해여성이 어렵게 마음 먹고 법정에 증인으로 나서면 성폭력 당하기 전 성경험을 따지듯 묻는다. 학벌·사유재산·부모 직업을 묻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게다가 데이트 상대 같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했을 경우 수사 과정 내내 고소 동기마저 의심받는다. 성폭력 피해여성들을 두번 세번 울게 만든다.
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지난해 성폭력상담건수 1천312건 가운데 63.8%가 성인여성이었다. 성폭력 피해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성인여성은 그러나 ‘가해자와 맞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회적 통념으로 사실상 법과 제도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 예컨대 지난해 음주에 의한 감경사유 배제나 형사사법절차에서의 피해자 권리 및 보호방안 등을 새롭게 만들었지만 아동성폭력피해에만 한정된다. 진술 과정에서부터 고소, 의료, 심리치료까지 지원받을 수 있는 해바라기센터나 원스톱지원센터, 성폭력전담수사반 등이 성인폭력보다는 아동·청소년 성폭력에 더 주력한다.
물론 아동성폭력에 대한 국가의 관심이 제도 정비로 이어지는 건 반갑고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유독 성인여성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책이 미비한 것은 심각한 문제다. 성폭력 피해자가 힘없고 나약한 존재일 것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성인여성 피해자들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친고죄의 폐지도 시급하다. 친고죄는 합의만 하면 형사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해자 측의 합의 요구가 집요하다. 가해자의 딱한 입장을 생각해 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도 몰리게 된다. 합의에 대한 압력은 수사 과정에서 주로 나타나는 걸로 알려졌다. 경찰 고소 후 대질 심문 중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 공간에 남겨둔 채 ‘원만히 화해하고 합의하라’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가해자 가족들이 피해자 직장으로 찾아와 고용주에게 피해 사실을 공공연히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피해자가 수사 과정에서 상처받는 ‘2차 피해’를 근본적으로 줄이기 위해선 성폭력범죄를 비친고죄로 개정해야 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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