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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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거듭했던 윤선도는 85세까지, 이익은 83세까지 살았다. 칠삭둥이로 태어난 한명회는 73세까지 살았다. 노론의 우두머리였던 우암 송시열은 여든 세 살에 명을 달리했다. 숙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서였다. 첫 사발을 마셨을 때 끄떡도 하지 않아 세 사발이나 마시고서야 비로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우암은 평소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모를 정도로 원기 왕성했다. 임금의 노여움을 사지 않았다면 백수(白壽)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유학자들이 장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든든한 배경이었던 가문이었다.

 

정지천 동국대 한의대 내과 교수의 ‘명문가의 장수비결’에 의하면, 학문을 닦으면서 자연스레 의학 지식을 같이 습득했던 것도 장수의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일례로 우암은 매일 어린아이의 오줌을 받아마셨다고 전한다. 한의학에서 어린아이의 소변은 화기(火氣)를 내리고 어혈을 풀어주는 것으로 보는데 의학에 밝았던 우암은 이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장수의 비결은 또 삼년상의 관습이나 유배다. 당쟁의 스트레스 및 음주와 기름진 음식, 여색 등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의 장수비결은 ‘소식(小食)’이었다. 경화세족(京華世族)들의 사치풍조를 비판했던 이익은 친척들과 함께 ‘삼두회(三豆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콩죽과 콩장, 콩나물 등 콩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절식하는 생활을 하자는 모임이었다. 18년 동안이나 긴 유배생활을 했던 정약용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만덕산 자락의 다산초당을 오르내리며 건강을 지켰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다 강진의 동문 밖 주막에서 음식 수발을 들었던 표씨 여인과의 만남도 도움이 됐을 터이다. 여인의 정성이 담긴 밥상에 고른 영양이 담겼을 것이란 얘기다. 그래서인가, 정약용은 75세까지 살았다.

 

그러나 함께 유배돼 흑산도에서 혼자 지냈던 형 정약전(丁若銓)은 59세에 세상을 떴다. 절해고도에 유배돼 막막한 절망감과 한을 술로 풀다가 술병을 얻어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술은 즐겁게 마시면 약이 되고 슬프게 마시면 독이 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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