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정문 오역

외교통상부의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 한국어 번역본이 오류 투성이인 것으로 밝혀졌다. 유형별로는 잘못된 번역 128, 잘못된 맞춤법 16, 번역 누락 47, 불필요한 첨가 12, 고유명사 오기 4건 등 모두 207건이다.

 

외교통상의 영문 번역은 외교통상부의 기초 업무다. 최고의 전문기관이다. 이 같은 정부 부처의 문건 번역본 중 틀린 게 그토록 많다는 것은 무책임하기가 짝이 없다. 상대되는 나라에 실례가 되기도 하고,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외교문서는 단 한 자가 잘못돼도 외교나 통상 마찰을 빚을 수 있다. 그 의미를 달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식’이 ‘수혈’로 ‘자회사’가 ‘현지법인’으로 ‘역학 서비스’가 ‘피부의학 서비스’ 등으로 오역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외교통상부의 문서로 보기엔 상상을 불허하는 저질이다.

 

이런 엉터리 번역본을 국회에 낸 것은 슬픈 코미디다. 물론 영자 원문도 함께 냈지만 국회의원이 외교통상 영어에 능통한 것은 아니다. 영자 원문 협정문보단 번역본을 주로 보고 심의하는 국회의원들이 많을 것이다. 만약 오역 투성이인 것이 드러나지 않고 넘어가, 엉터리 번역을 그대로 믿고 심의할 상상을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다. 그런데 오역은 한-미 FTA, 한-페루 FTA에도 적잖은 것으로 알려져 외교통상부의 오역 파동은 한-EU FTA 협정문 번역본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한-EU FTA의 국회 비준이다. 한나라당은 정부가 번역본 오류를 바로잡았으므로 4월 국회에서 처리하겠다지만 민주당 생각은 다르다. 이미 확인된 오역 문제도 있고 해서 모든 걸 충분히 검토한 뒤 처리해도 늦지 않다며 느긋하다.

 

한-EU FTA는 오는 12일 외교통상위에 새 비준안이 일단 상정되긴 한다. 그러나 외교통상위를 통과한다 해도 4·27 재보선 관계로 선거 전엔 본회의가 열리긴 쉽지 않을 것 같다. 협정문 처리가 이토록 지연되는 원죄가 오역에 있다.  임양은 주필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