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오색약수터 한참 지나 인적 드문 계곡 깊숙한 바위
틈에서 보았다, 4월의 짓무른 흰 눈 한 무더기
진즉에 식량이 바닥난 헐벗은 겨울 산중의 누더기 잔설들이
산그늘 쪽으로 밀리고 밀리어 항복하듯 백기를 내걸었다가
아니다, 아니다,
다시 돌아선 희끗한 목숨 몇몇이 골짜기를 따라 쫓기듯 숨
어들어와 함께 나누어 먹다 두고 간, 동무의
허벅살 두어 근
봄 깊은 골짜기 바위틈에 처박힌 흰 눈 한 덩이를 보며 시인의 자화상으로 여긴 적이 있다. 아니, 어느 가난한 시인이 아껴 먹다 두고 간 지상의 마지막 식량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후 백기를 내걸듯 산속 그늘로 희끗희끗 숨어든 잔설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내 발목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오래 들여다보다가 목이 메어온 적이 있다. 그 갸륵한 흰빛 앞에서 내가 뭘 어쩌지 못해 술에 취해 돌아오는 늦은 밤, 겨우내 마당 끝으로 몰아붙인 먼지투성이의 눈 더미를 발길질로 걷어찬 순간, 그 속에서 하얗게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캄캄한 의식의 눈사태에 매몰된 적이 있다. <이덕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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