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비’ 총리처럼…

이연섭 논설위원 yslee@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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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 아침신문에 실린 사진 한장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평택의 가구전시장 화재로 순직한 소방관들 빈소에서 김황식 국무총리가 슬픈 표정의 어린 소년의 손을 꼭잡고 있는 사진이다.

 

김 총리는 지난 4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주변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뒤 근처 식당에서 수행비서, 경호원 2명과 함께 된장찌개를 먹었다. 점심을 마친 총리는 “평택의 소방관 빈소로 가자”며 차에 올랐다. 갑작스런 총리의 지시에 당황한 경호원들이 총리실 의전관과 경호팀에 이를 알리려하자 김 총리는 “조용히 조문(弔問)하고 싶다”며 만류했다.

 

김 총리는 이에 앞서 이날 오전 이재만 소방위와 한상윤 소방장이 화재를 진압하다 숨진 사건을 보고받고 곧바로 수행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평택에 다녀오려 한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조용히 혼자가고 싶다”고 말했다. 오후 2시쯤 분향소에 도착한 김 총리는 유족들의 손을 붙잡고 위로했다. 고 이재만 소방위의 9살 난 어린 상주에게 “아버지가 뭐 하시는 분이신지 아니?”라고 물었다. 소년이 “소방관”이라고 답하자 주변에서 일제히 울음이 터져 나왔고 김 총리도 눈시울을 붉혔다. 총리실 간부들과 의전팀은 김 총리의 잠행(潛行)을 다음날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김 총리는 지난 11월23일 대전 현충원에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 1주기 추모식이 열렸을 때 40분 내내 장대비를 맞았다. 경호팀장이 우산을 받쳐주려 하자 치우도록 했다. 총리는 양복이 흥건하게 젖은 채로 전사자들의 묘역에 헌화하고 비석을 어루만졌다. 전사자의 부대 동기가 추모시를 낭독할 때, 비석을 어루만지며 총리는 울었다. 아까운 청춘을 조국에 바친 병사들에 비한다면 몇십분 비맞는 것쯤이야 뭐 대수로울 수 있겠는가 싶지만, 그동안 주변의 고위 공직자나 정치 지도자들에게서 보지못한 모습이었기에 짠한 감동이었다.

 

김 총리는 지난달 성남의 가천대 경원캠퍼스에서 대학생들과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요즘 유행하는 청춘콘서트 형식의 간담회에서 그는 예민한 질문들을 회피하지 않았다. ‘한미 FTA 괴담이 나온 것은 정부의 소통부족 때문’이라는 지적에는 “노력이 부족했다”면서도 “무조건 정부 발표를 믿지않으려는 사람도 솔직히 존재한다”고 했다. 인터넷 방송 ‘나는 꼼수다’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하지만 내용에 허위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또 안철수 원장의 기부에 대해서는 “사회환원 차원에서 (안 원장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나도 그런 대열에 동참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총리는 이 자리에서 “현대사회에서 군림하거나 술수적인 리더십은 통하지 않는다”며 “진지하게 들어주고 내가 두마디 할 때 상대방 말 여덟마디 들어주면서 눈높이를 맞추고, 낮은 자세로 하면 거기에서 오히려 리더십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날 총리는 “존재감이 없는 게 내가 목표하는 바”라면서 “국민들은 나를 잘 모르지만 내가 일한 게 쌓여서 국민에게 돌아가면 그게 더 좋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이슬비 같은 총리가 되겠다. 조용히 내리지만 땅속에 스며들어 새싹을 키우고 열매를 맺는 역할을 하는…”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조용히 일하겠다”면서 “컬러가 없는 게 내 컬러”라고도 했다.

 

대한민국의 차가운 12월에 김 총리가 국민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다. 역대 총리들은 실권없는 2인자로 각종 행사에서 대통령 축사를 대독하는 ‘대독 총리’거나, 정치적 국면 전환때 대신 짐을 지는 ‘방탄 총리’가 대부분 이었다. 그러나 김 총리는 스스로를 ‘중도저파(中道低派)’라고 말하듯 우리사회의 낮은 곳을 찾아 현장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선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자천타천의 실력자(?)들이 출현하고 있다. 그중엔 톱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당장 청와대 주인이 될 것 같은 사람들도 등장했다. 하지만 아직 그들에겐 신뢰감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젊은 세대들에겐 대단한 지지와 성원을 받는다지만 그 사람의 정체성도, 진실도 잘 모르는채 표면적인 것에 확 쏠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유창한 말보다는 조용한 카리스마로, 소낙비보다는 이슬비의 행보로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진정성있는 정치인을 만나고 싶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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