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원시인류를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약 300만년 전에 지구에 나타났다고 한다.
서서 걷는 사람 호모 이렉투스가 등장한 것은 약 150만년 전이다. 생각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년 전에 등장했다. 생각하는 인류는 약 5천년 전부터 그림문자 미디어로 역사시대를 열었다. 농경사회, 산업사회를 거쳐 오늘의 풍요로운 후기산업사회를 만들어 왔다.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전개된 정보화의 물결은 디지털 미디어에 탐닉하는 신종 인류를 만들어 냈다. 기성세대와는 달리 태교는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본 디지털(Born Digital)’들이 나타난 것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항상 긴장과 갈등을 불러 오게 마련이고, 세대간의 갈등은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변화를 둘러싼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간의 관계는 매우 흥미로운 일관성을 띄고 있다.
‘요즈음 젊은 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견제적 낙서가 시공을 초월하여 고대이집트 동굴 벽화나 피라미드 속은 물론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에서 발견된 바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알파벳을, 플라톤은 시나 소설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젊은 세대로 인한 변화의 폭, 깊이 그리고 속도를 제어해보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기성세대는 전통적으로 변화를 싫어해 왔으며, 신세대를 못 미더워했고 견제해 왔다.
계속되는 변화 속에서 제어하려는 기성세대와 회피하려는 젊은 세대는 수 없는 갈등과 마찰을 겪어 올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이들은 함께 해온 아날로그적 패러다임 속에서 서로 기본적인 소통에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30년간 형성된 신세대 ‘본 디지털’들과 기성세대간의 소통은 거의 단절의 지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날로그적 패러다임과 디지털적 패러다임의 호환이 어려운 것처럼 상호 인식상 단절의 골이 깊다. 기성세대가 아날로그적으로 풀기가 어렵다고 디지털로 인한 문제를 청소년들의 게임 이용을 셧다운하듯 일방통행적으로 손쉽게 조치하려 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삶을 존중하고, 디지털을 이해하려 애쓰며 함께 가려는 자세와 노력을 우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빗장을 걸면 문제는 갇히고 저절로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오늘날 젊은 세대와의 소통에는 디지털이 효과적이다. 아날로그는 도도한 디지털 문화에 의해 밀려나기 시작했다. 오페라나 시를 좋아하면 문화적이고 우아하며 모범생처럼 보는 시각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바둑이나 고스톱을 즐기거나 무협지에 빠지면 내버려 두다가, 인터넷 검색이나 인터넷 게임을 즐기면 중독여부를 조사하자는 식의 접근은 문화적 편견이며, 합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새벽 4시가 넘도록 검색하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며, 인터넷 게임을 즐기다가 노트북을 품에 안고 잠드는 ‘본 디지털’들의 일상이 알코올에 의존하거나 도박과 마약에 빠진 삶보다 훨씬 우아하고 첨단이라는 것을 기성세대가 빨리 깨달을수록 좋다.
장강의 앞물은 뒷물이 밀어낸다. 이제 앞물 아날로그가 뒷물 디지털에 의해서 밀려나기 시작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기성세대는 어쩔 수 없이 디지털 신세대들에 의해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떠나면서 새로 들어오는 후계자들에게 따듯한 손을 내미는 것이 미래지향적 관계발전에 필요한 미덕이라고 본다.
기성세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제어하기 위해 디지털 미디어를 신참문화라고 매도하거나 괄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울러 ‘본 디지털’에게 주역의 지위를 부여하는데 인색하거나 지체해서 득이 될 일은 더구나 없다.
김종민 게임문화재단 이사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