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2002 월드컵 개최권을 반납하라”

김종구 논설실장 kimjg@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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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아버지가 약을 먹고 자살했다. 빚에 쫓겨 다니는 아들에 짐이 되기 싫어서다. 그 아버지의 상이 있은지 며칠 뒤. 묘소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이번엔 아들과 가족들이 발견됐다. 역시 자살이었다. 1998년 3월28일, 연천군 청산면에서는 그렇게 한 가족이 사라졌다. 그해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간 2천248명이 목숨을 끊었다. 전년도 같은 기간 1천683명에 비해 36%나 늘었다. 우린 그렇게 늘어난 ‘36%’를 ‘IMF 자살’이라고 불렀다.

월드컵이 뭔가. 배부른 얘기고 한가한 소리였다. 김대중 당선자가 입을 열었다. “경제난에 따른 긴축재정 상황 등을 고려해 월드컵 경기장을 모두 새로 지어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김한길 인수위 대변인 전언·1998년 2월 4일). 이 말 한마디로 월드컵은 애물단지가 됐다. 나라 망친 정권이 남겨 놓은 짐이 됐다. 2002년은 더 이상 가슴 설레는 기다림이 아니었다. 여론조사의 60%도 상암 경기장 신축을 포기하라고 했다(청와대 관계자 발표·1998년 5월 4일).

시간이 빠듯했다. 개최 예정지 10곳을 돌아본 국제축구연맹의 결론은 한참 전에 나와 있었다. “월드컵 규격에 맞는 경기장이 한 곳도 없다. 잠실 운동장도 안 된다. 10곳의 경기장을 모두 새로 지어라.” IMF 자살 사건이 사회면을 채우던 대한민국이다. 누가 나서 수천억짜리 월드컵 경기장을 얘기하겠나. 월드컵을 반납하자는 여론까지 들끓기 시작했다. 나가누마 겐 일본축구연맹 회장은 “계속 늦어질 경우 중대 결심을 할 수 있다”며 빈정댔다.

IMF 환란속 DJ “월드컵 포기 없다”

월드컵 수원의 사정도 비관적으로 흘렀다. 경기장을 지어준다던 삼성이 뒤로 빠졌다. 통보방식도 간단했다. 행사장에서 만난 심재덕 시장에게 삼성 측 인사가 툭 던진 한 마디가 다였다. “돈 없어서 몬 합니다”-심 시장은 두고두고 이 때의 서운함을 얘기했다- ‘1시민 1의자 갖기 운동’을 벌였지만 3천400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대기엔 턱도 없었다. 수원이 개최지에서 제외된다는 소문이 점점 커져갔다.

몇 달이 흐르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 여론과 경제 전망 등을 종합 검토한 결과 상암 경기장 신축을 수용할 뜻이 있는 것으로 안다.”(청와대 대변인·1998년 5월 4일). 2002 월드컵의 한국 개최가 극적인 전환을 맞은 날이다. 비로소 상암 경기장의 조감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수원 경기장도 경기도비 60%가 수혈되면서 3천417억원의 공사비가 충당됐다. 나머지 8개 지역의 경기장 건설도 속도를 냈다. ‘포기할 순 없다’는 대통령의 결심에 월드컵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렇게 개최된 게 한·일 월드컵이다.

2002년 6월14일, 인천 문학 경기장이 환호에 휩싸였다. 가슴 트래핑에 이은 페인트 모션과 슈팅, 사상 첫 16강을 결정하는 박지성의 골이었다. 어수선한 라커룸으로 양복차림의 10여명이 들어섰다. 김대중 대통령 일행이었다. 히딩크를 끌어안은 대통령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던진 말이 ‘Good job, very good job’이다. 히딩크와 손을 잡은 대통령이 불편한 몸을 잊고 한동안 펄쩍펄쩍 뛰었다. ‘IMF 자살 공화국’속에서도 월드컵 강행을 결심했던 그에겐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아시안게임 반납하자’ 또 막말 난무

그 후 한국 현대사는 2002 월드컵 이전과 이후로 쪼개졌다. 이전은 IMF 국치의 시대로, 이후는 IMF극복의 시대로 기억됐다. 망신스런 IMF 한국의 이미지는 자랑스런 월드컵 한국의 이미지가 덮고 갔다. 대회 직후 나온 손익계산서에도 ‘+1650억원’이 찍혔다(FIFA, 조직위 집계). ‘월드컵 개최하면 나라 망한다’던 1998년의 목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그때의 전문가들, 그때의 언론인들 모두 월드컵 신화의 커튼 뒤로 숨기 바빴다.

2012년 6월이다. 사람들이 또 막말을 하고 있다. ‘2014 아시안 게임 반납’을 너무 쉽게 말하고 있다. ‘반납하겠다’며 협상에 써먹으려 하고, ‘반납하라’며 공격에 써먹으려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2년 뒤면 40억 아시아인이 인천에서 뛰고 인천에서 즐길 텐데…. 그때 그 부끄러움을 어쩌려고 또 이러는지 모르겠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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