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다움 찾아가며 감수성 기르는 것에서 시작
문화와 예술의 근본은 ‘자기다움’에 있다. 자기다움의 가치를 아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토대가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명품에 혹하고 성형수술이 만연하는 것도 자기다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탓이다. 어린아이처럼 있는 그대로 당당하면 못생긴 얼굴도 아름다울 수 있건만, 아름다움에 눈먼 이들이 애써서 망쳐 놓는 것이 이 시대의 풍조인 듯하다.
시대가 이러하기에 더 문화예술에 주목하게 되는 것일까. 주 5일제 근무가 확산되고 초중고 주 5일제 수업이 전면 실시되면서 문화예술교육 영역이 대폭 확대되고 있다. 학교에 예술강사제를 도입하고, 지역사회를 연계한 프로그램과 방과후 프로그램이 확충되고 있다.
또 문화의집이나 박물관, 미술관 같은 지역의 문화시설과 연계한 문화예술교육, 이주여성 같이 소외 계층을 위한 문화예술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BUY KOREA’를 외치는 문화관광부가 문화를 관광자원으로 바라보듯이,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창의성을 개발하는 전략으로 문화예술교육을 바라보는 시각도 정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듯하다. 과거의 인적자원이 ‘말 잘 듣는’ 국민이었다면 21세기의 인적자원은 ‘창의성 있는’ 국민이기에 ‘인적자원 개발’을 위한 방편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잘살아 보세’의 21세기판 리메이크인 셈이다.
그러나 문화예술 영역은 5개년 경제개발 하듯이 국가가 앞장서서 될 일이 아니다. 정부는 문화예술 진흥도 고속도로 놓듯이 후다닥 해치우고 싶겠지만, 사람이나 과일이나 제대로 익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문화와 예술은 창의성 개발이나 경제 같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신명나게 배우고, 신명나게 놀고, 신명나게 일하면 저절로 창의력도 생겨나고 진짜 경쟁력도 생겨난다. 아이들의 신명을 죽이는 교육환경을 그대로 둔 채 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운운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다.
창의성은 감수성에서 비롯된다. 창의성을 원한다면 무엇보다 아이들 스스로 자기 삶을 기획하고 창조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아이들의 시간을 다 빼앗아서는 촘촘한 시간표를 짜서 던져주고, 귀밑머리 3㎝와 5㎝의 차이가 교육의 질을 좌우한다고 믿는 한, 문화예술교육은 공염불이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머리 모양을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브랜드를 따지기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분위기에 맞춰 조화롭게 입을 줄 알도록 배려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감수성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질 수 있다.
자기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면서 공감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이는 예술가로 불리는 특정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일상에서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진실로 잘 살기 위해서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자기를 표현하고 주변 사람과 소통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제 우리 사회도 ‘잘사는’ 것을 넘어 ‘잘 사는’ 것에 관심을 가질 때가 되었다. 문화예술교육의 참된 가치와 역할은 그런 흐름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자기다움을 찾으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한다면 문화예술은 밥만큼이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양식이다.
이호철 선생이 아이들과 함께 작업한 ‘살아 있는 그림 그리기’ 결과물들을 보면 관찰력이 자라면서 아이들의 그림이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툰 선 그림도 대상에 몰입해서 애정을 갖고 그렸다면 그 나름으로 아름답다. 풀 한 포기를 세심하게 관찰한 경험은 아이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떤 일이든 실제적인 일을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일을 제대로 하자면 대충 보고 넘겨서는 안 된다. 체험 수준의 맛보기식 활동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일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대충 하지 않게 된다. 목공이나 도예 같은 손작업은 관찰력과 심미안을 길러 준다. 자유로운 손놀림은 단순히 손 기능을 넘어서 자유로운 사고로도 이어진다.
한 사회의 예술적 감수성은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것이다. 예술성이 살아 숨쉬는 건축물을 보면서 자란 사람이라면 창고 하나를 짓더라도 허접하게 짓지 않게 된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슬라브 지붕 형태의 조악한 건물들이 들어선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다.
날마다 콘크리트 상자 같은 학교 건물을 보면서 자란 사람들이 보고 배운대로 지었을 뿐이니. 안목이 있으려면 본때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공간이 곧 교사인 셈이다. 물론 그 공간을 만들고 아름답게 가꾸는 어른들의 작업 과정을 보면서 자란다면 더욱 훌륭한 교육이 될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잘 짜여진 예술교육의 결과물이 아니듯이, 문화와 예술은 기실 ‘교육’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비노바 바베의 말은 문화예술 영역에서는 더욱 진실일 것이다. 교육만능주의의 함정을 조심할 일이다. 진짜 예술교육은 교육 자체가 예술이 될 때 가능하다. 예술교육을 넘어서 교육예술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화예술교육사가 따로 있기보다 모든 교사가 교육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최고의 교육예술일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신명나고, 그 신명이 아이들에게 전염되고, 그 속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함께 자라는 교육예술이 펼쳐진다면, 그 어떤 예술보다 인생을 걸어볼 만한 예술이 아닐까. 교육이 예술적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이 일상의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때 진정한 문화예술교육이 꽃필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유달리 신명이 많은 피를 타고 났으니, 신명이 살아나는 사회환경, 교육환경을 만들면 문화와 예술은 절로 꽃을 피울 것이다. 멀리 보고 땅심을 기르는 데 주력할 때다.
현병호 교육잡지 격월간 ‘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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