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가 대통령에 당선된 일주일 뒤. 신문에 잡힌 제목들은 이랬다. “알고 봤더니 국가부도가 눈앞이더라”(97. 12. 22) “잠이 안 온다”(97.12. 23) “내 팔자는 고생만 할 팔자인가보다” (97.12. 24)…. 대부분은 대변인단이 해준 전언이다. 하지만 신문에는 직접 화법으로 묘사됐다. 김대중 당선자의 절절한 고뇌가 흘렀다. 이런 제목이 반복되면서 여론도 서서히 바뀌어갔다. 전임자(YS)는 국고를 거덜낸 사람으로, 후임자(DJ)는 그 국고를 걱정하는 사람으로.
기술이다. 문제 많은 정부를 이어받는 후임 정부의 기술이다. 이런 기술이 한 달여간 계속된 뒤 다음 수순이 이어졌다. “김 당선자 공약 전면 재검토 착수” (98. 1. 25). 물 흐르듯 자연스런 연결이다. 텅 빈 국고(國庫) 앞에서 고민하던 당선자가 결국엔 자신의 공약을 포기하게 된다는 기막힌 연결이다. 물가 3% 약속이 5~6%로 바뀌었다. 복지예산 30% 확보 약속은 보류됐으며 농어가 부채 경감 약속도 무기한 연기됐다. 정치 9단 DJ는 그렇게 전임자를 짓밟으며 빚더미 정부-IMF-를 넘겨받았다.
꼭 2년 전 우리는 그때의 일을 데자뷔처럼 경험했다. 민선 5기 출발과 동시에 민선 4기 짓밟기가 광풍처럼 일었다. 성남시가 불붙인 ‘모라토리엄’이 모든 지자체를 휩쓸었다. 호화 청사, 경전철, 종합운동장이 줄줄이 애물단지가 됐다. ‘민선 4기가 거덜낸 곳간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시장들의 애처러운 사연이 줄줄이 소개됐다. 그러면서 선거 때의 공약은 사라졌다. 대신 ‘호화 청사 개선안 마련’ ‘경전철 적자 개선책 마련’ ‘운동장 문제 심각’ 등의 과거사 물어뜯기가 지면을 채웠다.
민선 5기 2주년, 실적 안 보인다
여기까지는 봐줄 만했다. 문제는 그 이후다. 적당히 하고 그만했어야 했는데 때를 놓쳤다.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전임자 탓에 세월을 좀 먹고 있다. 그렇다고 뭐 하나 고쳐 잡은 것도 없다. 매각하겠다던 호화청사는 여전히 공무원들의 아방궁이다. 시장실에 꾸려놓은 북카페가 전부다. 돈을 아끼겠다던 경전철은 국제 재판에 지면서 되레 예산 먹는 하마가 됐다. 물어줄 돈이 5천억원이었는데 엊그제부터 7천억원으로 늘었다. ‘개인 기업이면 구속됐을 것’이라고 비난하던 그 운동장은 시장 얼굴을 TV에 내보내는 선거 운동장이 돼 버렸다.
인천시는 더 심하다. 전임자 탓을 넘어 전·현직 간 설전이 여지껏이다. 서구에 신축 중인 주 경기장을 두고도 ‘국비 거부가 원인’(現) ‘재정사업 전환이 문제’(前)로 맞선다. 인천타워 계획도 ‘102층으로 축소한다’(現) ‘151층이 타당하다’(前)며 신경전이다. 이밖에 밀라노디자인 시티, 지하철 2호선 개통시기, 인천 세계도시축전 등을 두고도 건건이 논쟁이다. 아시안 게임을 반납해 국제 망신을 당할지도 모르는 지경의 핵심도 듣다 보면 ‘전임자 탓’으로 끝난다.
‘민선 4기 탓’ 회견 이제 그만해야
다들 정치 9단 DJ에게 어설프게 배워서 이렇다. 오로지 전임자 짓밟는 기술만 배워서 이렇다. 그다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배우질 못했다. 국민의 정부가 역사 속에 후한 점수를 받는 건 전임자 짓밟기 때문이 아니다. 전임자의 잘못을 고치고 바로 잡는 노력과 결과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97년에 88억달러였던 외환보유고가 5년만에 1천214억달러(2002년)로 채워졌다. 이 수치를 확인한 사람들이 ‘국민의 정부는 괜찮았던 정부’ ‘DJ는 역대 존경 순위 두세 번째 대통령’이라고 하는 것이다.
낼 모레면 민선 5기 취임 2주년이다. 뭘 들고 기자회견을 할 건가. 또 전임자 탓하고 모라토리엄 핑계 대는 자료로 꽉 채울 건가. 아무리 봐도 그럴 시장들이 수두룩할 것 같아 걱정이다. 유권자들은 진작부터 ‘남 탓 그만하고 일 좀 하라’고 말하기 시작했는데….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이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에게 말했다.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이옵니다”. 주인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며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태복음 25장 24절~30절)-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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