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적 감성통해 아이들의 아픔까지 어루만져요
‘주5일제 수업’ 시행 다섯달 째. 처음에는 늦잠도 자고, 인터넷 게임도 하고, 마음대로 TV리모콘도 돌려 보지만 그것도 한두달, 재미가 없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박물관, 미술관 등 각 지역 문화예술기관에서는 다양한 ‘토요문화학교’ 프로그램을 쏟아내고 있다. 수원미술전시관이 진행하고 있는 ‘새싹 비빔밥’도 그중 하나다.
이곳에서는 여러가지 음식 재료 대신 자연, 생명, 창조, 관계, 조화, 공감이라는 재료를 이용해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만지기도 하면서 아이들 스스로 문화예술적 감성을 끄집어 내도록 돕고 있다. 박신혜(57ㆍ여) 새싹 비빔밥 강사는 “이 프로그램은 이벤트 행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매만져주고 캐어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며 “오감을 통해 창의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고 설명했다. 쉰을 넘긴 박신혜 강사, 그는 어떻게 초등학생 아이들의 ‘대장’이 됐을까.
비가 유난히도 많이 내리던 지난달 30일 ‘새싹 비빔밥’이 진행되는 수원 어린이미술관체험관 문 앞에 선생님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때문에 학생들이 오지 못할까 하는 걱정에서다.
다행히 15명의 아이들이 질서있게 들어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이날 수업 주제는 ‘나만의 감성 화분만들기’. 이색적인 수업 주제에 순간 의아해 했지만, 다섯 번째 수업인지라 이내 아이들의 얼굴엔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오늘은 촉촉관계를 표현하는 날이라 내 마음속 생각을 화분으로 만들어볼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먼저 마인드 맵으로 알아볼까요?”
‘대장’ 박신혜 강사가 간단하게 수업내용을 설명했다.
아이들은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각자의 공책을 펴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 남자 아이가 이름 석 자를 써놓고 한참을 생각하다 ‘스마트폰에 대한 환상’, ‘자유’, ‘멘탈 붕괴’…. 쭉쭉 그려 나갔다.
옆에 앉은 이지은양(13)은 정확하게 현재 자신의 기분을 써내려갔다. 이 양은 “늦게 일어난데다 비가 와서 짜증이 났고,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걱정되는 것을 표현했다”며 수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10여분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파람 주인공은 처음에 봤던 그 남자아이로 이름은 조준상(13)이었다. 조군은 “나모 모르게 공책 가득 내 생각을 적으니 기쁜 마음에 저절로 휘파람이 나왔다”며 “내가 쓴 이야기들이 어떤 화분으로 만들어질까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날 수업에 참여한 15명의 아이들은 샘물지역아동센터 소속으로 2주에 한 번씩 이곳에 와서 수업을 받는다.
박 강사는 “프로그램 시작 전 진행되는 마인드 맵은 아이들 뇌 속의 구조를 읽어보기 위한 것”이라며 “아이들 마음은 단순하지만 맥락을 읽어보면 어른들만 할 수 있는 철학적 사고를 아이들도 이미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신없이 마인드맵을 하던 아이들은 맛있는 간식을 먹고 실전(?)에 돌입했다. 바로 마인드 맵핑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고 색칠해서 화분을 만드는 것.
아이들 앞에는 하얀 화분이 하나씩 놓여졌다. 책상 위에는 화분을 꾸밀 수 있는 아크릴 물감, 붓, 사인펜, 가위, 자 등 도구들이 있다. 3개 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된 이날 교육은 학생 2~3인당 교사 1명이 옆에 붙어 아이들이 작품활동을 주도하고 교사가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조용하던 교실은 종이에 그림을 그려 자르는 아이, 물감으로 화분을 꾸미는 아이, 자기 그림을 선생님에게 자랑하는 아이들로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참여학생 중 가장 어린 이사랑양(7)은 자신을 닮은 귀여운 여자아이, 알록달록한 꽃을 그리고 “사랑해, 보고싶어, 예쁜 마음을 그려 화분에 꽃처럼 심었다”며 배시시 웃었다.
옆 책상에 앉은 강재영군(8)의 작품에서는 강군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림 하나하나 자를 대고 반듯하게 그리고, 색깔없이 연필로만 화분에 꽂을 ‘감성 꽃’을 완성시켰다.
이날 수업을 돕기 위해 참여한 이경선 한경대 교수는 생각지도 못했던 작품들이 나오자 계속 감탄사를 연발하며 아이들 칭찬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재영이가 만든 화분 정말 예쁘지 않아요? 재영이는 자와 연필만을 갖고 자신의 분명한 생각을 아릅다게 표현했어요. 신기하죠? 아이들이 만들고 있는 작품을 통해 그 아이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어요.” 이 교수의 말이다.
아이들의 바쁜 손놀림에 작품이 하나둘 완성되기 시작됐다.
“여러분, 자리를 정리하고 친구들 작품을 구경해볼까요?”
박 강사의 말이 떨어지자 꾀부리는 아이 하나없이 정리정돈을 하기 시작했다. 무대가 만들어지고 박신혜 강사가 MC가 됐다. 자신이 만든 감성화분을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자랑할 시간이다.
처음부터 손을 들며 적극적으로 발표에 나선 조도상군(10)은 축구대회에서 이겼을 때, 반 친구 32명 모두가 자신의 친구라 기쁘다는 등의 꽃을 소개했다. ‘마음의 부자’라는 칭찬이 이어졌다.
특히 조군은 하얀 화분을 다양한 색깔로 칠해놓고 “오늘 아크릴물감을 처음 썼는데 잘 마르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도 알게 됐다”며 씩씩하게 발표를 마쳤다.
머뭇거리던 황충민군(13)은 수학시험이 사려졌으면 좋겠다는 마음, 우주비행사가 돼 우주에 가고 싶은 마음 등을 캐릭터화 해 표현했다. “우주비행사가 되기 위해서는 싫은 수학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사들의 피드백에 고개를 끄덕였다.
박 강사는 “사실 오늘 발표를 한 아이 중 한 명은 지난번 역할극 시간에 소리내어 울었었다. 늘 우울해있던 아이가 마음 속 이야기를 우리에게 꺼낸 것”이라며 “오늘도 마음 깊은 속에 있는 자신의 느낌을 발표하는 걸 보니 아이의 마음이 열리고 있는 과정이라는 걸 느꼈다 ”고 예술과 치유의 어우러짐을 설명했다.
이어 “단순히 만들고 그리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몰랐던 자신의 귀중함, 그리고 마음 속의 숨겨놨던 아픔까지 어루만질 수 있어야 비로서 프로그램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 토요문화학교, 통합교육프로그램 필요하다
주5일제 수업이 시작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토요학교가 생겨나고 있지만 미술, 공연예술, 치유 등의 교육이 합쳐진 통합프로그램은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최근 사회변화에 따라 맞벌이, 한부모, 저소득층 등의 가정이 증가하면서 아이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질 수 있을만큼의 깜냥을 갖춘 통합프로그램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런 가운데 ‘새싹비빕밥’은 맛있는 예술재료를 통해 아이들이 다양한 사람들과 교감을 하고, 소통을 하는 놀이예술로 서로의 감정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나눌 수 있어 토요문화학교 중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언어습득력은 물론 자기표현력이 뚜렷해지는 아이들의 변화에 학부모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이사랑양의 어머니 신지영씨(34)는 “사랑이가 독후감을 쓰는 데 글을 쓰는 걸 힘들어했다. 평소 미술을 좋아해 센터에 오게 됐는데 마인드맵, 다양한 체험 등을 통해 언어 구사 능력이 향상됐다”며 “한 분야 교육에 치우치지 않고 함께 진행되니 전체적으로 발달되는 것 같아 정말 좋다”고 말했다.
박신혜 강사는“사실 새싹비빔밥에 배치된 교사가 2명 뿐이다. 매 수업마다 여러명의 선생님이 좋은 취지를 알고 참여해준다”며 “아이가 사회라는 자연망 속에서, 사회라는 숲 속에서 건강하게 관계를 맺게 돕는 것이 여기에 있는 교사들의 마음”이라고 전했다.
그는 또 “아이들은 어른과 달라 A와 B가 연계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이 이어지면 C라는 또다른 생각을 얻어낼 수 있다”면서 “미술이면 미술, 수학이면 수학 하나 분야에만 집중된 현재 교육현실보다 이들 모두를 합친 통합프로그램으로 아이의 영특함과 자존감을 형성시켜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혜준기자 wshj222@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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