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2006~2011) 18억병이 팔렸다. 하루 100만병이고 1초당 11병꼴이다. 22㎝ 병을 눕혀 연결하면 4만㎞ 지구를 10바퀴나 돈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주가 분명하다. 이런 소주, ‘처음처럼’이 대선판을 얼쩡거리고 있다. 무슨 얘긴가.
‘문재인은 소주 처음처럼’. 보수성향의 한 매체가 내 보낸 지난주 기사 제목이다. 문재인의 개인 취향을 얘기한 듯해서 들여다봤는데 그게 아니다. 문 후보가 내세운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의 글씨체가 문제(?)였다. 거기 쓰인 글씨체가 소주 ‘처음처럼’의 그것과 같다는 얘기다. 기사는 “이 글을 쓴 사람이 대표적 진보학자인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확인됐다”며 흥분했다. 그러면서 신 교수의 이력을 장황하게 소개했다.
“신 교수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 삼았던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1968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신 교수는 민족해방전선을 주도하며 공산혁명을 획책했었다. 당시 육군 중위 신분으로 박성준(한명숙 전 민주당 대표 남편)씨를 포섭했던 조직비서 출신이다…(출소 이후) 2002년 연세대에서 민노당 당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자본축적은 근본적 모순 체제’ ‘자본주의 체제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국보법 폐지와 6·15 및 10·4 선언이행 촉구에도 앞장서 왔다.”
문재인 슬로건에 종북 색깔 입히기
40년 전 통혁당 조직도까지 등장시킨 이 기사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문재인 후보가 슬로건에 사용한 글씨체는 처음처럼 소주의 글씨체와 같다→그 글씨는 신영복 교수가 쓴 것이다→신 교수는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종북좌파다→그러므로 신 교수의 글씨체를 사용한 문재인 후보도 종북좌파다’.
케케 묶은 얘기다.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체 논란은 꽤 된 일이다. 2006년 7월, 두산이 이 제품을 출시할 때부터다. 당시 두산은 신 교수의 서예작품명이던 ‘처음처럼’을 제품 이름으로 정했다. 신 교수는 글씨체 사용료나 개인적 보상 없이 이를 허락했고, 두산측은 답례로 신 교수가 재직중인 성공회대에 장학금 1억원을 전달했다. 보수층에서는 이를 두고 ‘좌파 성향의 참여정부이기 때문에 가능한 얄팍한 상술’이라며 못마땅해 했다.
보수층의 심기를 건드린 기억은 또 있다. 그 해 9월 28일.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들이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처음처럼’이다. 모임의 회원들은 “2007년 대선에서 민주개혁세력의 역사성을 담보한 정권 재창출을 위한 준결사체가 되자”고 결의했다. 이래저래 ‘처음처럼’과 보수층의 악연은 쌓여갔다. 이후 ‘보수’를 자처하는 인사들 사이에 소주 ‘처음처럼’은 ‘좌빨 소주’로 불렸고 지금도 기피 주종 1순위다.
철 지난 이념논쟁, 보수조차 짜증
그런데 그런 ‘처음처럼’이 18억병이나 팔렸다. 우파를 자처하는 MB 정부 들어서 되레 더 팔렸다. 2009년 4억병, 2010년 4억4천만병이다. 이랬으면 결론은 난 거다. 정치인의 이념 논쟁이 소비자의 입맛 선택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난 것이고, 보수층의 좌빨 공격이 이효리의 섹시효과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결론이 난 거다. 이념 공세의 소재로 더 이상 재미 볼 수 없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또 들고 나오려 한다. ‘대선 후보 문재인+종북좌파 신영복 교수+국민 소주 처음처럼’을 뒤섞어 대선용 ‘좌빨 소주 칵테일’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한다. 진보가 웃을 일이고, 보수도 짜증 낼 일 아닌가.
이런 일이 있었다. 편의점 ‘7-Eleven’이 대박 상품을 내놨다. 매장마다 설치된 ‘7-Election 08’이란 기계다. 음료수를 판매하는 종이컵마다 대통령 후보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오바마와 매케인 후보의 컵은 고객이 선택하게 했다. 회사측은 판매되는 종이컵의 수를 실시간으로 공개했다. ‘7-Eleven’의 주요 고객은 독신의 젊은 직장인이다. 공화당측에서 얼마든지 문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매케인은 불평하지 않았다. 고객과 유권자, 매케인 모두가 ‘7-Eleven’이 발표하는 ‘지지율’을 보며 그냥 재밌어했다.
너무 비교된다. 2012년 대선에 이기려고 2006년 출시된 술병에 글씨를 쓴 사람의 1968년 공소장까지 뒤적거리는 한국의 일부 보수. 어쩌면 그들의 이념이야말로 1968년에 딱 멈춰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슈&토크 참여하기 = 좌빨 소주 ‘처음처럼’]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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