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집안에만 있기를 거부한다.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어디로든 가 달라고 부모를 보챈다. 더운 여름을 이기고 아이들의 소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집을 벗어나는 길밖에 도리가 없을 터.
얼마 전 빗길에 가까운 벗들과 강화도를 찾았다. 한 번 찾고 나니 아이들을 데리고 꼭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강화대교를 흐르는 한강 유역을 따라 문수산성이 엿보이는데 그 산성 밑 월곶리에 홍선웅 작가가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46년 전, 1866년(고종3)은 봄부터 피비린내가 천지에 진동했다.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린 뒤 프랑스 신부를 비롯해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박해를 피해 탈출한 한 신부가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해 10월, 로즈가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하자 조선은 제주목사로 있던 양헌수를 불러서 수복계획을 지시했고, 양헌수는 치밀한 전략을 세워 산성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을 격퇴시켰다.
홍선웅의 ‘문수산성’은 평온한 일상이다. 이 작품 어디에서도 병인양요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산하는 투명할 정도로 푸르러서 그저 어느 여름날의 한적한 풍경으로 읽힐 따름이다. 그런데 하나하나 살펴보면 이 작품의 일상에는 지금 여기의 남한 현실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왼쪽으로 한강 유역을 경계 짓는 3?8선 철책을 끼고 월곶리 가는 길이 이어지고, 그 길 오른 쪽으로는 접경지 마을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코앞 한강 물을 만져보지도 못할 것이다. 문수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에 산성이 들어차서 뒤와 앞을 가로 막는다. 나무들과 산하는 변함없이 푸른데, 우리는 그 사이를 나누고 갈라서 이렇듯 오도 가도 못하게 했다. 먼 역사는 물론이고 지금도 첨예한 남북 분단의 현실이 저 일상에 콕 박혀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저 일상으로 들어가 북한을 바라보며 남한의 풍경을 그려왔다. 목판화의 진경을 찾아 20여년을 헤맨 끝에 그가 찾은 둥지이기도 하다. 올 여름에는 아이들과 함께 저 길을 걸어 월곶리에 가 볼 것이다.
김종길 미술평론가·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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