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만의 불볕더위란다. 1994년의 더위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루하루가 푹푹찌는 것은 알겠다. 더위에 맞서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한낮 더위는 피하되 그늘이나 물을 즐겨서 여름을 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더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이 벌써 입추이지 않은가!
더위를 상상하면 항상 ‘불’이 떠오른다. 그 불은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불이다. 조용히 자근자근 타는 불도 있고 숯불처럼 열기만을 내뿜는 불도 있다. 그러나 여름 더위는 그런 불이 아니다. 초불과 막불 사이의 중불처럼 하늘로 치솟는 불이다. 그래서 불볕더위라는 말은 여름 더위를 가장 뜨겁게 표현할 때 자주 언급된다.
어린 아이들은 태양을 붉고 둥글게 표현한다. 아이들의 태양도 이글거리는 불이다. 그 불은 행동하는 불이요 살아있는 불이며, 우주만물의 생명을 키우는 살림의 불이다. 불이 없이는 집도 사람도 산도 나무도 성립되지 않는다. 정정엽의 붉은 팥을 상상할 때 나는 그런 불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정정엽은 오랫동안 팥을 그려왔다. 초기에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나 어딘지 모른 벽, 골목 등 어떤 상황을 암시하는 곳에 붉은 팥을 그려 넣다가 점점 팥 그 자체를 그리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화면이 하나의 모판이라면 팥은 그 판에서 펼쳐지는 카오스모스(혼돈질서)의 불이었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무한의 중심이 뜨겁게 확장되는 팥이었다가 고요히 침잠에 든 팥으로 돌변하고, 뚝뚝 떨어지는 피방울 같은 혈류였다가 한 떨기 불꽃처럼 육화를 이룬 신의 말씀 같기도 했다.
여름의 불볕더위 없이 숲의 생장이 있을 수 없고 불의 태양 없이 아이들의 그림이 완성될 수 없듯이 정정엽의 팥은 육화된 말씀 없이 이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팥은 어머니이기도 하고 그 자신이기도 하고 그 어머니와 자신의 수다이기도 하고 그 수다의 오래된 서사, 즉 ‘나’로부터의 여성사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토록 붉은 팥의 ‘무한(無限)’을 한 겨울에 그린다. 긴 겨울밤을 나기 위해 선택한 가장 적절한 창작방법론은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화면을 장악해 나가는 집중력이었다. 입추가 시작되는 오늘, 이 팥 그림에서 삶의 실천을 고민해 볼 일이다.
김종길 미술평론가·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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