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성성한 ‘영원한 소녀들’ 인형극 통해 제2인생
고목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말이 있다. ‘광명향토실버인형극단’(단장 오승민) 할머니들이 바로 그렇다. 나이 70이 넘으면 삶을 마무리할 때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 극단의 할머니들은 버젖한 인형극단 단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 은발성성한 할머니들이 제 2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데에는 광명문화원(원장 이영희)의 어르신문화학교가 있었다. 이원희 광명문화원장은 “할머니들이 극단 활동을 하면서 자존감이 생기고 삶의 보람을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성과”라며 “실버극단을 문화와 복지를 결합한 사회적 성공 모델로 키워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 백발성성한 ‘영원한 소녀들’, 열정만큼은 1천%
지난 8월 7일 오후 1시. 광명문화원 공연장에 할머니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본래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2시간씩 연습을 해오고 있지만 이날은 다음날 있을 춘천인형극제 참가에 대비해 2시간이나 일찍 모인 것.
극단 이름은 ‘영-걸스’. ‘영원한 소녀들’이란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지, 공연장에 들어서는 할머니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해맑다.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나누고 얘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여고 동창회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연습에 앞서 할머니들 앞에 웬 바짇고리? “이도령 옆구리가 트더졌네?” “파란색 실 좀 줘봐요.” 갑자기 한판 인형 수선작업이 펼쳐진다. 금이야 옥이야 손자 다루듯 손보는 이 인형들은 인형극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 스폰지로 만든 인형의 팔에 철사를 연결해 움직이는 손 인형이다. 이런 형태의 인형은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조정한다. 자연스런 극을 위해서는 단원들의 호흡이 무척 중요하다는 얘기다. 남의 대사까지 줄줄 외울 정도가 돼야 한다니 어느 정도 손발이 맞아야 할지 예상이 됐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사는 녹음을 통해 해결했지만 70살 전후의 할머니들에게 인형 조작은 꽤 까다롭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창단이후 할머니들을 지도해온 장영주 강사는 “한 장면을 수백번 이상씩 연습을 했다”며 “열정만큼은 그 어느 인형극단에 뒤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흘린 땀이 일궈낸 열매는 풍성했다. 지난해 춘천인형극제 아마추어 경연대회에 참여해 비록 입상은 못했지만 큰 박수를 받았고, ‘할머니 인형극단’의 솜씨를 본 이들을 중심으로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화성인형극제 등 공연 초청이 쏟아졌다.
인형극 공연은 할머니들의 삶에도 큰 활력을 줬다.
김신자 할머니(68ㆍ광명시 일직동)는 “손주들이 “할머니 최고!”라고 한다. 아이들이 우리 공연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쁘고 보람된 지 모른다”고 말했다.
‘광명향토실버인형극단’은 4년전 광명문화원이 창단한 실버극단이다. 본래 목적은 문화원이 마련한 관내 답사 프로그램인 ‘광명은 내고향’과 연계해 아이들에게 향토 인물을 알기 쉽게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효성 문화원 사무국장은 “2008년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관내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에게 보다 쉽게 향토 인물을 소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인형극을 생각하게 됐다”며 “지금은 인형극이 끝나고 어르신들이 커튼콜을 하면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아이들도 좋아하고 어른신들도 너무나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원이 모두 할머니라고 얕보면 큰 오산이다. 2008년 처음 모인 7명의 1기 단원들은 10여년 정도 함께 호흡을 맞춘 숨은 배테랑들이다. 이들이 인형을 다루는 솜씨는 웬만한 전문 인형극단에 버금갈 정도다.
“인형 자체가 사람이 되는 거예요. 말 못하는 인형이 말을 하고, 아무 감각이 없는 팔다리에 감각을 불어넣어 주는 거죠. 인형에 생명을 불어 넣는 거예요.”
오승민 영걸스 단장(70)은 “인형과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 마냥 즐겁다”고 했다.
극의 내용은 관내 답사와 연계된 만큼 광명 대표 향토인물의 삶과 철학을 다룬다. 지난 4년동안은 조선시대 여성무역상으로 활약한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극적인 삶을 그린 ‘여장부 강빈’을 무대에 올렸다. 올해부터는 선조, 광해군, 인조 등 조선시대 3대 임금에 걸쳐 40여년 동안 정승을 역임하고, 청백리의 대표인물이 된 오리(梧里) 이원익을 소재로 한 인형극을 선보이고 있다.
오승민 단장은 “광명시 모든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와서 본다”며 “오리 이원익 선생의 충효사상과 청렴한 삶이라든지, 민회빈 강씨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오래도록 기억해준다면 우리 사회가 보다 좋아지지 않을까하는 자긍심을 갖고 공연을 한다”고 말했다.
“경로우대석에 앉아 공연관람이나 해야 할 나이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어 행복합니다. 더군다나 요즘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한데 훌륭한 위인들의 업적을 알려 아이들이 건전한 인성을 갖도록 하는데 작지만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에 힘이 절로 납니다.”
맏언니 박용자 할머니(73ㆍ구로구 구로1동)가 인형극의 기쁨을 이야기하자 단원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영걸스는 지난 6월 2기 단원 10명을 뽑았다. 활동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다. 인형극을 한 번 보고 간 학교들에서 다시 한 번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것도 인원 충원의 한 이유가 됐다.
이효성 사무국장은 “앞으로는 문화원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학교나 복지단체 등 대외적인 봉사활동도 늘려 나갈 계획”이라며 “문화와 복지, 봉사를 결합한 사회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광명향토실버인형극단을 문화 전문 노인자원봉사단으로 키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무대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겠다는 영걸스 할머니들.
“저희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두 편(민회빈 강씨, 오리 이원익) 말고 좀 더 다양한 지역 콘텐츠를 발굴해 작품으로 올리고 싶어요. 그래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광명시 전 시민들에게 우리 지역의 자긍심을 갖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인형극을 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영걸스 할머니들의 꿈이다.
이영희 원장은 “지역의 향토인물 인형극을 통해 광명시민들에게 자긍심과 함께 역사의식을 고취시켜 나갈 것”이라며 “향후 제작될 향토인물 인형극과 함께 시리즈 향토문화콘텐츠로써 활발한 문화 교류뿐 아니라 광명의 역사인물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열정으로 무대를 접수한 영걸스 광명향토실버인형극단, 이들의 몸짓이 지역사회에 작지만 따뜻한 감동을 주고 있다.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yeonggi.com 윤철원기자 ycw@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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