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면회!” 교도관이 그를 불렀다. 직감적으로 사형집행을 눈치 챈 듯했다. 벌떡 일어선 그가 뺑끼통(변기통) 뒤로 가 머리를 숙였다. 그리곤 얘기했다. “야, 나 없다고 그래” ‘정치주먹 천하’(1978·유지광 著)에 소개된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모습이다. 저자 역시 사형수 출신이다. 극적인 감형 덕에 살아남은 ‘주먹’이다. 그래선지 목숨 앞에 약해지는 사형수들의 얘기가 유독 많다. 교도관들이 몰려 와 ‘면회!’를 외칠 때마다 사색이 되는 사형수, 사형 확정 한 달 만에 머리가 백발로 변해버린 사형수, 형장으로 가는 길에 자기가 기르던 새를 바깥 세상으로 날려 보낸 사형수….
이제는 모두 소설 속 이야기다. 한국은 1997년 이후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다. 93년 사형이 확정된 원○○이후 58명의 사형수가 여전히 살아있다. 사형미집행 급증은 필연적으로 사형 공포의 반감을 가져왔다. ‘사형 집행은 사실상 없어졌고, 설혹 시작해도 순서에 따를 것이며, 수십 명을 모두 집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그들만의 논리인 듯하다. 징역형과 생명형의 구분 자체가 모호해졌다. 교도소가 도피처가 되고 있고, 사형선고가 관심 밖 얘기가 되고 있다.
울부짖는 유가족, 원두커피 찾는 살인범
오원춘 사건의 현장을 본 법의학자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이렇게 참혹하게 시신이 훼손된 사건은 처음이다.’ 그 사건에 대해 들은 후문(後聞)은 이렇다. 수사 초기부터 오원춘의 태도는 “빨리 끝내달라”였다. 담당 검사는 “애초 국민참여재판을 예상했지만 오원춘이 거부했다”고 전했다. 재판정에서도 여전했다. 재판장까지 나서 “모두 인정되면 중형이 선고될 수 있는데 왜 인정하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속전 속결’을 원했다. 사형선고가 뻔한 재판을 피고인은 서두르고 판사는 멈칫거리는 이상한 광경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강모씨는 한밤중 주택가에서 광란의 살인극을 벌였다. 주점에 침입해 여주인과 손님을 칼로 찔렀다. 다시 가정집에 뛰쳐 들어가 일가족에게 칼을 휘둘러 살인까지 저질렀다. 하지만 영장실질심사장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죄를 인정한다. 영장실질심사 필요 없다. 그냥 구속시켜라”였다. 부녀자 살해범 서○○는 현장검증이 있기 전까지 11끼니를 굶었다. 그러더니 “돌 맞을 각오로 갔는데 (현장검증이)그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더란다. 자장면, 김치 꽁치찜, 두부조림, 제육볶음, 잔치국수, 김치 볶음밥…. 요즘 그가 국민 예산으로 매 끼니 주문해 먹고 있는 사식(私食)이다.
사형이 확정된 흉악범들의 교도소 생활도 기가 차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의 내용은 명확해야 하고, 집행기관의 자의적인 해석과 적용은 배제해야 한다.” 마치 법학 논문의 한 구절 같은 이 문구는 사형수 정○○이 쓴 소장(訴狀)의 일부다. 살려달라며 애원했을 초등생 혜진·예슬 양을 무참히 살해한 그가 교도관이 자신을 쪼그려 앉혔다며 고소했다. 두 생명을 빼앗고 두 가정을 파탄 낸 그의 입에서 지금 ‘헌법상 행복 추구권’이 얘기되고 있다. 2009년 2월 대법원의 사형 확정은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교도소는 피난처로, 사형 선고엔 코웃음
케케 묶은 사형제 논란을 여기서 재연할 생각은 없다. 다만, ‘똑같이 죽여달라’고 울부짖는 유치장 밖 유가족과 ‘원두커피 좀 사오라’는 유치장 안 살인범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지(서○○ 사건)…. ‘수면제 없인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교도소 밖 피살자의 언니와 ‘4개 국어로 방송되는 TV시청권이 보장된다’는 외국인 교도소로 갈 학살자의 생활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지(오원춘 사건)…. 여기에 대한 질문을 한 번쯤 던져보고 싶을 뿐이다. 사형 찬성론자든 사형 반대론자든 뭔가 할 말이 있지 않겠나.
1995년 2월1일, 쾰른시의 한 법정에서 수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을 쏜 사람은 아메드 아푸한이라는 52세의 평범한 가장이다. 그는 얼마 전 아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불에 타 참혹하게 숨진 모습이었다. 법정에서는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 재판을 받고 있었다. 총을 숨겨 방청석에 들어온 아푸한은 살인범이 시야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변호인이 증인을 부르는 순간 총을 꺼내 난사했다. 살인범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공범 등 3명도 중상을 입었다. 1949년 사형이 폐지된 독일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겐 그 순간 그게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슈&토크 참여하기 = 사형 폐지론자들에게 묻는다 “이게 인권인가”]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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