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기행을 떠나다]1. 다산 실학은 인간학과 경학의 만남이었다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ㆍ냉철한 자기성찰 '다산학' 밑거름

올해는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유네스코(UNESCO)는 다산의 위대한 업적을 기려 ‘2012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장 자크 루소, 헤르만 헷세, 드뷔시와 함께 4인 공동으로 선정됐다. 다산관련 기념행사도 줄을 잇고 있다. 필자는 다산탄신 250주년 및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 선정기념 행사와 학술대회와 ‘실학기행 2012’에 직접 참여해 다산 형제의 유배지인 강진·흑산도를 다녀왔다. 다산연구와 현장답사를 통해 ‘왜 다시 다산인가’ 라는 취지에서 다산 탐사 내용을 5회에 걸쳐 소개한다.

1. ‘다산 실학’은 인간학과 경학의 만남이었다

2. 밤남정 주막집의 두 형제이별

3. 강진·흑산도에서 만난 실학의 혼

4. 유배지서도 꿈에 그리던 고향 ‘초천’

5. 유네스코 선정 ‘2012세계문화기념인물’

다산 정약용은 1762년에 경기도 남양주시 한강변 마재마을에서 태어나 대학자로 명성을 남기고 1836년 향리에서 7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올해는 다산 선생이 태어난 지 250년이자, 세상을 떠난 지 176년이 된다. 활동하던 때로 보자면, 다산은 200년 전의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가 생전에 이룩해 놓은 광대한 학문인 ‘다산학’이 오늘 우리에게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21세기에 왜 다시 정약용인가

‘실학기행 2012’에 동참한 80여명 일행의 첫 걸음은 마재마을의 낮은 뒷동산 다산묘소 참배로부터 시작됐다. 숙연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묘소도 이렇게 기품있을 수가 있구나 싶었다.

일행은 실학박물관에서 1시간여 다산강론을 듣고, 이어 다산의 공부방 여유당(與猶堂)을 둘러보았다. ‘여유’란 ‘겨울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으로 ‘노자’에서 구절을 따 온 것이라 했다.

다산에게 있어, 세상사에 대한 경계는 관직에 오른 후에도 그가 평생 지켜야할 잠언 같은 것이었다. 1800년(정조24) 1월,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와 조용히 여유당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다산을 끌어내 머나먼 유배길에 오르게 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시공을 넘어 21세기인 지금도 애틋한 스토리로 다가온다.

인간 정약용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나

다산의 ‘인간학’과 ‘인간’ 다산의 총체는 사람의 존재를 무엇보다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자신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을 매우 중시하였다.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관계의 연속이고, 그것이 인간존재의 본성이라 하였다.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다산은 사회적관계로 파악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유배생활을 통해 민(民)을 폭넓게 이해하고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었다. 1801년 유배초기 강진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거주할 공간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 때 주막의 한 이름없는 노파가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주어 학문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데서 민을 새롭게 인식했던 것이다.

민들과의 관계와 덕성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 공감하지 않으면 체험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그것은 유배를 통해 다산만이 가질 수 있는 망외의 소득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배라는 공간은 다산의 사회적 존재방식과 인간관계를 바꾸게 했고, 종국에는 다산본인의 인식과 정서자체를 변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위민’서 비롯된 다산학은 곧 인간학

다산에게 경학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시문이었다. 이유는 그 속에 민의 삶과 정감이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이며 민에 대한 기본적 신뢰에 기초하고 민 특유의 낙관적 삶과 그 내면적 정감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다산은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반이고, 남은 반은 목민(牧民)이다”라고 하여 사대부의 존재방식을 규정하면서, 벼슬에 나서기 전에는 수신을 하고 벼슬길에서는 진정한 목민관을 추구했다. 솔직하고 곧은 성품의 소유자인 다산은 정조의 총애에 뛰어난 학문적 자질, 그리고 관료로서의 실무능력을 무기로 행동에 거칠 것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의 직선적인 성격에다 구애받지 않은 솔직한 언행은 복잡다단한 조선시대 파쟁적 정치세파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다산은 자신의 당호(堂號)인 여유당을 회고하며 언젠가 다음과 같이 숨은 속내를 말한 적 있다.

“나의 병통은 용감하지만 지모가 없고 선을 좋아하지만 가릴 줄 모르며,

맘 내키는 대로 행하여 의심하거나 두려워 할 줄 모르는데 있다“

솔직하게도, 대 학자는 ‘그만둘 수 있는 일도 마음에 기쁘면 하고, 하고 싶지 않지만 마음에 불쾌하면 그만두지 않았다’는 말로 순리를 따르지 않았음을 가감없이 술회하고 있다. 이어서 유배에 대해서도 ‘나 자신의 운명이라기보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행동과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자기고백을 한 바가 있다. 이런 것들이 인간 정약용의 참된 모습이며, 학자일 뿐 만 아니라 시문학인으로 인간사회와 세상을 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겸하여 가졌기에 그런 냉철한 자기성찰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인간 다산의 내면은 끊임없는 자기절제와 성찰로 귀결된다. 그 위에 다산 사상과 학문이 자리했기에 오늘날의 위대한 ‘다산학’이 태동한 게 아닐까.

주지하다시피, 유배지 강진에서 다산은 실학(實學)을 집대성, 조선의 새 길을 제시한 대학자이자 위대한 사상가였다. 반계(磻溪) 유형원, 성호(星湖) 이익으로 이어져온 ‘경세치용파’의 사유와 개혁정신을 계승하면서, 일찍이 규장각 홍문관에서 ‘이용후생파’의 세계와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접하고 그 과학기술을 체득, 실현하였다.

다산은 실학을 통해, 인간 존재와 현실적 문제의식에 비추어 유교경전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사유의 바탕과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품성을 닦고, 소위 정법집(政法集)으로 불리는 1표(表)2서(書)와 논설들을 통해 치인(治人)의 정도와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는 인간학과 경학(經學)을 토대로 사회개혁, 과학기술, 서학 등을 자아화(自我化)하였다. 인문적 주체인 자아를 갈고 닦으면서 사회과학과 과학기술을 회통한 점이 주목된다.

다산학 핵심은 경학 그리고 시문학

다산학의 핵심은 뭐니해도 그가 남긴 경학 저술에 있다 할 것이다. 한편으로, 다산학에서 문학의 비중도 경학 못지않게 다루었으며, 시문 작품 속에 현실과 이상을 늘 함께 그리고 폭넓게 사유하였다. 그렇듯 다산의 시문은 그의 경학세계에서 자주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의 경학과 문화의 만남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한다. 다산은 자의시(字義詩)에서 인(仁)을 중심으로 한 경학적 성과를 칠언절구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 다스리는 게 바로 두 사람이니 ... 人以治人是二人

두 사람이 관계 맺을 때 곧 인이 되도다 ... 二人之際卽爲仁

인이란 사람과 사람의 ‘지극한 관계’라 하였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목민관가 백성간 二人이 그런 관계라는 것이다. 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다산의 경학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민의 현실과 삶을 주제로 포착한 시문이 많은 것도 근원을 파고들면 다산의 경학세계와 합치되고, 상호연관 하에 있기에 그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포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보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실학은 조선후기의 대표적 사상’이라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조선후기는 현실과 제도의 간극이 너무 먼 시대였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조선후기의 과학적 실용사상이 실학인 것이다.

우리역사상 조선시대의 선각자적 개념인 ‘실학사상’은 자연히 낡은 제도와 관념적 사유를 벗어버리려는 문예부흥적이며 문명의식적 성격을 담고 있다. 다산학 속에 경학의 집대성 뿐 아니라, 인간학·시문학, 그리고 다산철학까지 함께 베어있다고 보는 이유도 그런데 있다. 게다가 ‘다산학의 세계화’가 자리하고 있으며,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다산탄신250주년을 기념해 ‘실학기행’에 나서 다시 다산을 찾게 된 연유 또한 거기에 있다 할 것이다.

구동수 (사)다산연구소 연구위원·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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