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ㆍ왕따' 토론으로 해법 찾기 "아이들이 달라졌어요"
올 1~11월 정신건강검진을 받은 경기지역 초ㆍ중ㆍ고생 1만3천649명 가운데 최근 3개월 내 자살을 시도하거나 생각해 본 경험이 있는 학생은 3천457명에 달했다는 경기도 정신보건센터의 연구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학교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로 남아있지만 어른들이 말로만 전하는 예방책에 학생들은 반응조차 없다.
이런 가운데 아이들이 직접 나서서 학교폭력 현장을 과감하게 바꿔버릴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교육연극연구소 프락시스(PRAXIS)가 만든 학교폭력예방프로그램 포럼연극 ‘눈사람? 눈사람!’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19일 오전 “집중 박수 시작!” 우렁찬 진행자의 목소리가 수원 당수초등학교 강당을 뒤흔든다. 왁자지껄 친구들과 장난을 치느라 정신없던 당수초 6학년 학생 180여명은 “짝짝~짝짝짝 집중!”을 받아치며 이내 귀를 기울인다. 그런 아이들에게 책ㆍ걸상 몇 개가 있는 소박한 무대에서 연극을 보여준다더니 갑자기 학교폭력, 이른바 ‘왕따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어린이 관객들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진행자는 무대에서 펼쳐질 연극을 소개한다. 학교폭력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집단 왕따가 일어나는 연극을 관람한 뒤 관객이 공연에 직접 참여해 잘못된 장면을 자기 생각대로 바꿔보는 ‘눈사람?눈사람!’이라는 것.
3D도 4D 영상도 아닌 배우들이 나와 속마음까지 말해주는 5D(?)의 한 장면으로 토론이 시작됐다.
때리는 포즈를 한 남학생, 몸을 웅크리고 맞는 학생, 지켜보는 학생,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어른. “때리지 마”라고 속마음을 이야기 한 친구를 위해 학생들은 너도나도 손을 들며 “그러면 안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용기있는 학생 하나가 무대로 나왔다. “괴롭히지 말고, 때리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친구는 신고하고, 어른은 말려야 된다”고 말하며 배우들의 몸짓과 표정을 일일이 바꿔줬다.
본 연극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이미지 전환하기, 질문던지기 등을 통해 학교폭력에 대해 생각하고, 처음 경험해보는 포럼연극을 이해하며, 마치 자신의 상황인 것처럼 집중하기 시작했다.
김지연 프락시스 대표는 “아이들이 학교폭력에 대해 머리로는 알고, 머리로 답을 하지만 마음으로 오는 지점은 애매하다”면서 “학생들이 관객이 아닌 상황의 변화를 함께 만드는 사람으로 접근해 그들이 머리로 아는 답이 과연 진짜일까라는 과정을 스스로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막이 바뀌는 동안 스크린에서는 ‘자살 고교생, 사망 전 폭행’, ‘대구서 9개월 새 9명 자살’, ‘카톡 때문에 자살’ 등 학교폭력에 관련된 기사들이 이어졌다.
남학생 2명, 여학생 2명, 전학생, 선생님, 엄마가 출연하는 연극이 드디어 시작됐다. 내용은 이렇다. 영어 연극 대회에 나가게 된 ‘하나’네 반에 영어를 잘하는 ‘소민’이가 전학을 온다.
‘소민’은 아이들이 맡기 싫어하는 나쁜 역할의 주인공을, 반장 ‘영인’이는 연출을 맡게 된다. 집과 학교에서 연습하는 도중 ‘영인’과 함께 ‘진일’, ‘병진’은 ‘소민’을 왕따로 만들고 괴롭히고, 결국 소민이는 자살을 시도한다. ‘소민’을 원래 알고 있었던 하나는 자신이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고민에 빠진다.
연극이 끝나자 “신고해요”, “병진이를 때려줘요”, “소민이를 도와줘요” 등 의견이 다양했다. 윤소정양(13)은 “소민이가 불쌍했어요. 용기 내서 신고를 한 뒤 소민이를 위로해주고 같이 놀고 싶어요”라고 전했다.
한바탕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뒤 아이들은 직접 ‘하나’역을 맡아 잘못된 부분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쓰레기통을 수민이 머리에 씌웠던 장면, 눈 가리고 술래잡기할 때 때렸던 장면, 마마보이라고 놀렸던 장면 등. 하지만 객석에서 자신 있게 대답했던 아이들도 무대에선 ‘하나’의 역할을 다 보여주지 못했다. 지켜보는 입장과 자신이 직접 상황에 있을 때의 부담감이 달랐던 것.
이런 상황에서 나쁜 친구들을 혼내주고 소민이를 도운 이정빈군(13)의 기사도정신이 단연 돋보였다. 이군은 소민이가 맡았던 나쁜 역할을 자처하며 소민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을 애초부터 만들지 않았다. 또 쓰레기통을 씌우자고 주동했던 진일이가 오히려 쓰레기통 괴롭힘을 당하게 상황을 만드는 등 연기 내내 진지한 모습으로 할 말을 다하고 마지막까지 소민이를 도와주는 모습에 객석에선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정빈군(13)은 “친구를 때리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 소민이가 친구들한테 괴롭힘을 당할 때 ‘싫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하나 역을 연기했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수원지역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자리 잡은 당수동에는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없다. 학교라곤 당수초가 전부이다. 지역적 특색상 유동인구가 많지 않아 이사를 하지 않는 이상 1학년 때부터 6학년 졸업반이 될 때까지 함께 생활한다. 다시 말하면, 왕따를 한 번 당한 학생은 학교를 떠날 때까지 상처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당수초등학교 측은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프락시스에 학교폭력 관련 연극을 당수초에서도 공연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날 공연은 놀라운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여러 친구가 무대에서 피해자를 도와주며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주는 의젓한 연기를 선보인 것. 그 중 교내에서 친구들을 괴롭혔던 아이들도 있어 더욱 놀라웠다. 이를 지켜보던 6학년 담임선생님들도 해당 학생의 변화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자신들도 직접 관객배우로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나타내기도 했다.
김연이 6학년 부장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학교폭력은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이런 시간을 마련했다”며 “오늘 아이들이 직접 무대를 꾸미며 하는 모습을 보니 선생님들이 해주지 못하는 부분이 채워진 것 같다. 앞으로도 기회만 생긴다면 전 학년으로 확대해 외부 도움을 받고 싶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도 변화를 엿볼 수 있는 학교폭력예방프로그램이지만 더 큰 무대에서 많은 학생에게 보여주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프락시스가 경기문화재단으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지난 10월부터 5개 초ㆍ중교 학생 1천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다른 기관에서는 포럼연극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해 이 사업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연 대표는 “포럼연극이 연극도 교육도 아닌 중간에 끼어 있어서 연극 쪽에선 교육, 교육 쪽에선 연극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지원을 꺼려한다”며 “이번 연극처럼 사람들이 점점 개인화되는 시점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하나의 작은 주제에서 끌어내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앞으로 청소년 간의 경쟁, 사이버라는 공간에서 생겨나는 문제점 등을 다룰 계획이다. 연극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인식 개선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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