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부상조의 정신, 시민들 흥겨운 놀이로 승화
에 헤리 방애호
에 헤헤리 방애호
이 방아가 뉘 방안가
방아방아가 돌방아냐
지난 11월 10일 토요일 오후, 복잡한 부천역 남부광장에 때 아닌 논을 다 매고 나오면서 부르는 ‘방애소리’가 울려퍼졌다. 빼빼로데이를 앞두고 데이트 나온 연인들, 대형마트에 시장보러 나온 가족들, 친구들과 소주 한잔 하러 나오신 어르신들까지 가던 길을 멈춰 서서 넋 놓고 공연을 보고 있다.
농부 100여명이 짚신을 신고 나와 논매기를 하고 나서 ‘농기(農旗) 싸움’ 하는 장면은 고층빌딩이 즐비한 부천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풍경치곤 생경스럽다. 쌀쌀한 늦가을, 농부들은 왜 도심으로 뛰쳐 나왔을까.
# 각 마을 농기ㆍ풍물패ㆍ농군, 자웅을 겨루다
부천시민들의 발과 눈을 붙잡은 농부들은 부천우수전통민속놀이 ‘석천농기고두마리’ 공연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부천농기고두마리보존회 소속으로 초등학생부터 주부, 교사, 어르신, 대학생 등 세대를 막론하고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돼 있다.
부천문화원(원장 박형재)이 주최하고 부천농기고두마리보존회(회장 손영철)가 주관한 석천농기고두마리는 풍물이 어우러진 일명 ‘상좌다툼놀이’다. 1800년대 초부터 1910년대까지 옛날 부평군 석천면, 현재의 부천시 송내동과 상동 및 중동 일대에서 이어온 민속놀이다. 십 수년 전만해도 넓은 벌판의 평야지대인 이곳에서 논농사와 세벌매기를 마치고 7월 백중(음력 7월 15일) 날 마을 대항으로 치른 놀이로 특히 철종 이후 조선 말기에 성행했던 것으로 전해 온다.
석천농기고두마리는 농기를 사용하는데 농기 위에 꿩의 꽁지깃을 여러개 모아 묶어 만든 꿩장목을 꽂는다. 이 꿩장목을 부천 고유어로 ‘고두마리’라 불러왔고, 농기싸움은 바로 이 고두마리를 빼앗는 놀이인 것이다.
농기고두마리는 우선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고된 농사철을 보내는 가운데 농민들이 서로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뜻으로 행해졌다. 다른 한편으론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반상의 차이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신분상승에 대한 희망을 농기다툼의 승자를 통해 표출하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부천의 들녘이 사라지면서 농기싸움도 자연히 사라졌다. 그런데 어떻게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을까.
이는 부천 지역 향토 사학자를 중심으로 1990년대 초부터 ‘석천농기고두마리’ 복원과 재연작업을 해왔고 2010년 8월에는 ‘석천농기고두마리’의 발전적 계승을 위해 ‘부천농기고두마리보존회’가 창립하면서 가능했던 것.
# 재연이 아닌, 시민들과 함께하는 흥겨운 자리
10일 오후 4시, 부천역 남부광장에 서촌말, 솔안말 양 마을 풍물패가 농기를 앞세우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등장하자 행사가 시작됐다.
이어 논매기 준비를 위한 한마탕 놀이가 펼쳐지고 풍물이 그치고 북이 논매기 준비를 알리기 위해 점고가 끝나자 100여명의 농군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논 안으로 들어가고 ‘상사디 소리’에 맞춰 논매기 한다.
세벌 논매기가 끝나자 마을 장정들의 씨름판과 마을잔치가 벌어졌다. 풍물이 진행되는 동안 지난해 패자마을 사람들이 제사상을 차려 놓고 같이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풍물패는 농기를 중심으로 풍물을 치고 농군들은 자기 마을 사람들의 사기를 돋우는 함성과 춤으로 열기를 달궜다. 지난해 승자마을에서 패자마을에 농기싸움을 하자고 점고를 보내고 패자마을에서도 싸움에 응한다고 점고를 보낸다. 지난해 패자마을의 농기가 놀이에 앞서 상좌마을의 농기에 기 세배를 한다.
기 세배가 끝나자, 각 마을의 농기는 서로 밀고 당기며 자웅을 겨루었다. 이 장면이 바로 석천고두마리 행사의 하이라이트.
빙빙돌면서 만났다가 멀어지기도 하면서 서로 한껏 두 세 차례 시세를 폈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싸움이 시작되고 마을 사람들의 절반은 자기 마을의 농기를 지키기 위해 빙 둘러서고 나머지 절반은 상대 마을의 농기를 쓰러 뜨리기 위해 상대 마을 농기를 향해 달려갔다.
이날은 서촌말 농군들이 솔안말 농기에 꽃혀 있는 깃털(고두마리)를 뽑아 승자가 됐다. 솔안말 농군들은 땅에 주저 앉아 분함을 감추지 못해 땅을 치고 짚신을 벗어던지기도 했다.
농기싸움 후 양쪽마을 풍물패가 하나돼 신명나게 춤을 추며 노는 화합의 한마당을 끝으로 공연은 막을 내렸다.
1시간여 동안 진행된 공연을 지켜보던 시민들도 흥겨운 풍물소리에 어깨를 들썩이며 즐거워했다.
무엇보다 전통민속놀이 공연에 소녀 팬들이 몰려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김가현(소명여고 1년) 학생은 “여월초등학교 풍물부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가요나 팝송 보다 흥이 나는 우리 풍물소리를 더 좋아했다”며 “친구들과 같이 직접 와서 보니 앞 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 시대 살고 있는 요즘엔 볼 수 없는 농경사회의 협동정신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석천농기고무마리에서 이긴 농군은 패자의 노고를 치하하고 패자는 승자를 위해 축배를 드는 아량이 있다. 무엇보다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우애가 숨어 있다. 이에 부천문화원과 부천농기고두마리보존회는 단순한 재연이 아니라 현재를 함께 하는 살아있는 민속놀이로 되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박형재 부천문화원장은 “신도시 개발로 인한 급작스런 도시의 변천사 속에서 석천농기고두마리는 많은 향토 사학자들이 놀이의 근간을 찾아 연구해 계발함과 그 내용을 자료화해 놀이의 원형을 찾아낸 것으로 앞으로도 자료를 바탕으로 시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석천농기고두마리를 알고, 즐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글_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_전형민기자 hmje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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