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실현 가능한 복지만 약속드립니다.” 많은 이들이 이 말에 든든해했습니다. 복지 공약에 135조원을 배팅하셨죠. 상대 후보의 190조원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런데도 선택됐습니다. 적은 복지 약속이 되레 신뢰를 높인 결과입니다. 물론 대선 승리 요인을 한두 가지로 정리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세대 간 대결, 지역 대결, 이념 대결, NLL…. 수도 없이 많죠. 하지만 이렇게는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박 후보의 복지 공약은 믿을 만했다”.
그런데 이게 불안하게 갑니다. 그 중 세 가지만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기초(노령)연금입니다. 2014년부터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 정도씩 준다고 했습니다. 당장 2014년부터 13조 원이 필요하고 이후 4년간 60조 원이 들어갑니다.
두 번째는 4대 중증 질환 진료비 국가 부담입니다. 암ㆍ심장ㆍ뇌혈관ㆍ희귀난치병 환자에 대한 복지를 약속했습니다. 현재 75%인 비급여율을 2016년까지 0%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0~5세 영유아 보육비 지원입니다. 모든 아동에게 보육료를 지원하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지 않으면 양육수당 명목으로 월 10만~20만원씩 지급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전문가들은 이 세 가지를 얘기하면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시행하면 안 된다. 고소득층은 주면 안 된다’(노령 연금). ‘(2조5천억원)돈도 문제고, 현실성ㆍ형평성이 모두 문제다’(진료비 국가 부담). ‘양육수당을 받으려고 아이들을 시설에 보내지 않는 부작용까지 우려된다’(영유아 보육비 부담). 그러면서 결론 냅니다. ‘공약을 수정해야 한다’. 그런데 인수위 쪽에서 나오는 설명은 없네요. 혹시 전부 다 지키실 생각입니까. 그래서 국민이 불안합니다.
4조 확보에도 국민 불안
그제 밤 12시 넘어 새해 예산안이 확정됐습니다. 정부 예산에서 4조1천억원이 삭감되고 4조3천억원이 새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엔 0~5세 무상보육 1조4천억원, 반값 등록금 4천억원, 저소득 사회보험 1천468억원, 사병 월급 258억원, 참전 명예수당 400억원이 포함됐습니다. 언론에서는 이걸 ‘박근혜 예산’이라고 부릅니다. 차수를 변경해 가며 여야가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이 예산표를 보면서 가슴 철렁이는 국민이 많습니다. 깎여서는 안 될 예산이 잘려나갔습니다. 국방 예산 2천900억원이 삭감됐다는데 그 돈으로 차세대 전투기 사고, 전차 사고, 공대지 유도탄 사려고 했답니다. 안 그래도 2007년 8.8%이던 국방비 예산이 4.2%까지 곤두박질 친 나라인데…. 의료 급여 2천824억원을 깎았다는 얘기는 더 가슴이 아픕니다. ‘없이 사는 사람’ 156만명에게 돌아갈 돈입니다. 미리 물었다면 국민 다수는 말렸을 겁니다. 국민이 그렇게 매정하지 않거든요.
안 그래도 주부들은 불안하던 터였습니다. 대선 다음날 광역상수도 요금이 5% 올랐습니다. 전기요금도 올해부터 4% 오릅니다. 민자고속 도로 통행료도 올랐습니다. 복지 천국 대선이 끝나자마자 터져 나온 공공요금 인상 폭탄입니다. 여기에 국방비 전용하고 극빈자 의료급여 삭감했다는 얘기까지 왔습니다. 주부 A와 직장인 B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선자가 복지 공약 다 지키겠다고 하면 어쩌나. 큰일이다’ . 135조 가운데 겨우 4조 손댔는데 이러고들 있습니다.
선거 때 하신 복지 약속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복지 약속은 꼭 실현하겠다’, 다른 하나는 ‘내 공약은 국민에 부담 주지 않는다’. 그런데 공공요금이 올랐습니다. 가정에 부담 준 일입니다. 국방 예산이 뭉텅이로 잘려나갔습니다. 국가 안위에 부담 준 일입니다. 의료 급여가 대거 삭감됐습니다. 없는 이들 서럽게 한 일입니다. ‘복지 실현’이라는 앞의 약속을 서두르면서 ‘건전 재원’이라는 뒤의 약속은 저버린 것이죠. 출발부터 잘못 가고 있습니다.
135조 복지 손실 불가피
그래서 하려는 얘깁니다. 복지 공약을 파기 하십시오. ‘안 될 공약’ 걸러내고, ‘무리한 공약’ 수정하고, ‘부담 큰 공약’ 버리십시오. 그래야만 복지 기대가 복지 불안으로 전락하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복지 불안이 복지 공포로 악화하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복지 공포가 복지 저항으로 돌변하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대선이 열 나흘 지난 2013년 1월 2일, 여론의 시곗바늘은 이미 복지 불안의 언저리에서 째깍거리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슈&토크 참여하기 = “복지공약 파기 하십쇼, 박 당선인”]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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