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날들은 밀도가 높다. 살아온 날들의 기억들이 응결되는 순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1년치의 기억은 1피코(pico)의 방보다 작은 세포들 속으로 들어가 숙면을 취할 것이다. 가끔씩 어떤 인연들이 뒤흔들거나 때때로 불면처럼 찾아들어서 혼란스러울 때가 아니라면 그 기억들은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새해의 새날들은 빛나는 새 기억들로 총총히 등불을 켤 것이다. 줄줄이 환하게 불 밝힌 집어등처럼 나날의 사건들은 기억비(碑)에 새록새록 새겨질 것이 뻔하다. 기쁘고 좋은 것들은 물론이요, 슬프고 나쁜 것들조차 빠트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순간들이 물 흐르는 초서(草書)라면 헤어지는 시간들은 곰곰이 되씹어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전서(篆書)일 테다.
김정욱의 ‘빛나는 것들’은 하나의 어떤 작품이 아니라 그의 모든 작품들을 하나로 묶는 형용구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들은 ‘빛나는 것들’로 불리기도 하고 그것의 증거들이기도 하다. 빛나는 것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응결’에서 찾는다. 기억의 집어등처럼 삶의 끝에서 마지막 빛을 발하는 것, 새겨지고 닳아 흩어진 뒤에도 탁본으로 떠오르는 문자들, 그런 것.
‘빛나는 것들’의 작품들은 그러나 현실의 전경(前景)만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눈앞의 현실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것으로는 투명한 응결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너무도 뚜렷한 현실의 ‘지금, 여기’를 살지만, 그 현재는 쉴 새 없이 ‘그때, 거기’로 물러나 버린다. 무엇인가를 붙잡으려 해도 그때뿐이다. 지나간 것은 현실이 아니고 그래서 볼 수 없는 지경에 놓인다. 그 볼 수 없는 지경이 ‘후경(後景)’이다.
김정욱은 전경에서 ‘빛나는 것들’의 실체를 찾기도 했으나 2000년 이후에는 후경에서 더 많이 길어 올리는 듯하다. 지금 보고 있는 것도 후경에 속한 얼굴이다. 얼굴은 한 눈에도 성모마리아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성모마리아일까? 속단할 수 없다. 순정한 저 마리아의 얼굴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동정녀’의 기억들이 응결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작가는 후경으로 걸어 들어갔으나 전경의 기억들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는 후경의 후경으로 깊숙이 들어가 전경이 상실한 ‘빛’을 채굴했다. 그런데 그가 발굴한 빛나는 것들은 우리가 쉽게 쓰고 시궁창에 처박았던 ‘애도’, ‘돌봄’, ‘응시’, ‘우정’, ‘환대’, ‘경청’의 이미지였다. 마리아의 눈빛을 보라. 그 눈빛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는가?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