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화가들은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 머리카락 한 올도 빠트리지 않았다. 얼굴은 ‘얼이 깃든 상(像)’이니 그 상을 극진하게 묘사하여 얼(정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에 집착해서도 아니 되었다. 진심(眞心:참마음)을 올바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에 집착하는 것이 형해화(形骸化)다. 내용은 없고 모양뿐이라는 것이니, 형식의 뼈대만 갖췄을 뿐 가치나 정신 따위를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화가는 한 사람의 상에 골몰하되 집착을 벗어야 하며, 얼을 밝히되 진심을 다하여야 한다.
자, 그런데 화가가 아무리 밝히려 들어도 얼이 혼란스럽고 상이 가파르면 어떻게 될까? 상의 표정이 들쭉날쭉하여 얼을 잡기가 도무지 바람 잡듯 하다면? 그런 사람의 얼굴은 날고 기는 화가여도 도무지 그려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붓은 흰 종이에서 붓바람으로 휘몰아 칠 게 뻔하다. 참으로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안의 얼을 다스려 상의 올바름을 길어 올리는 일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얼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얼 깨움’의 길을 닦아야 한다. 얼을 깨우지 않으면 날짐승과 다르지 않으니까. 얼을 깨워 얼을 닦고 얼을 다스리는 일은 평생의 일이다. 얼굴은 그렇게 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얼이 깊게 깃들어야 어여쁘다. 성자의 화장터에서 발견하는 사리는 어여쁜 얼이 아니고 무엇일까?
김정욱의 ‘빛나는 것들’은 바로 그 얼사리의 투명한 구슬일지 모른다. 우리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내 안의 빛나는 것들, 바로 그것들. 순간순간의 진심의 삶들이 모이고 쌓여서 어느 순간에 응결된 얼의 유리알 같은 것들. 그것들은 새카만 마음우물(深淵)에서 빛나는 내 자아의 흰 그늘일 것이다.
그림에서 천사와 동행하는 아리따운 저 흰 사람이 바로 나와 다르지 않다. 나의 ‘나다움’이 커질수록 나의 광배(光背)와 구슬도 더 밝아 질 것이니, 나도 또한 밝아질 터. 아니, 본래 우리는 밝은 땅의 밝은 사람들이라 하여 ‘밝달족’의 배달겨레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루하루 부지런히 얼 깨워 나의 나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나다움이 진아(眞我:참나)를 실현하고 진심을 일으켜 얼굴의 진면목을 세우리라. 우리는 그 날들의 찰나를 소중히 모셔야 하리라.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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