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원에서 놀자]<27>연천문화원 '제1회 미수문화제'

'조선의 대학자' 허목,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재조명하다

경기도 연천군에는 없는 것이 많다. 우선 병원과 대형마트가 없다. 그리고 4년제 대학이 없다. 여기에 3차선 자동차 전용도로도 없다. 그러다 보니 서울과 연천은 불과 60㎞밖에 되지 않지만 2시간이 넘게 걸린다. 이처럼 연천군이 의료ㆍ문화ㆍ교통 등의 인프라가 열악한 것은 수도권정비계획법상 성장관리권역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각종 개발행위가 엄격한 규제를 받아 ‘없는 것’이 많은 연천군에서 2012년 처음 ‘생긴 것’이 있었다. 이름하여 ‘미수문화제’. 이름만 들어선 사생대회를 연상케 하지만 실체는 조선 후기의 문신, 미수(眉?) 허목(許穆, 1595~1682년) 선생을 기리는 문화제다.

연천군 사람들도 잘 모른다는 미수 허목 선생은 연천과 무슨 인연일까. 2012년 10월 19일, 연천문화원(원장 이경순) 주최로 열린 ‘제1회 미수문화제’를 통해 허목 선생은 다시 태어났다.

■눈썹이 눈을 덮을 정도로 길었던 허목 선생은 누구인가

미수 허목은 1595년 한양 창선방에서 현감 교(喬)의 삼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이다. 태어날 때부터 손바닥에 문(文) 자가 새겨져 있어서 자를 문보(文甫)라 했고, 눈썹이 눈을 덮을 정도로 길어서 호를 ‘미수(眉?)’라 했다. 영의정을 지낸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년)의 손녀와 19세에 결혼했는데, 이원익은 허목의 그릇을 알아보고 “언젠가 반드시 내 자리에 앉을 사람이다”고 공언을 했다.

조선 제19대 왕 숙종 때 우의정까지 지낸 허목은 흔히 조선왕조의 일반적인 선비와는 다른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걸었다.

허목은 조선의 대학자, 문신으로 사상적으로는 이황, 정구의 등의 학통을 계승해 이익에게 전승시킴으로써 기호학파 남인의 선구자이고 남인 실학파의 토대가 됐다. 그는 당시의 사회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대안의 제시에 주력했다.

즉, 그의 예(禮)를 준거로 한 합리론은 정치적으로 왕권강화를 위해 여러 주변세력들을 통제해 왕조의 권위와 질서를 확립하고 일반대중들이 왕실에 대해서 유교적이 예를 보편화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집권층인 사대부의 권위를 높이려는 입장에 정면으로 대립했다. 특히 일반 사대부이 기회균등을 보장하려는데 주력했다.

또한 허목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방의 제1인자’라는 독특한 그의 전서체이다. 중국 진한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가 문자에 적용된 경우인데 그 아름다운 글자체는 그가 직접 쓴 ‘척추동해비’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 비석을 세워 삼척의 바닷물도 물러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신기가 어려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시와 글을 쓰면 말년을 보낸 은거당, 한국전쟁 때 소실

허목은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소재한 ‘은거당’에 칩거하면서 지인들이 청해오는 묘비문이나 비문 등을 써주고 시와 글을 쓰며 말년을 보냈다.

은거당(恩居堂)터(연천군 향토문화재 제14호)는 미수 허목이 말년에 자연을 벗삼아 저술 활동을 주로 행했던 곳으로, 허목이 84세가 되던 해인 1678년(숙종 4) 국가에 공이 많은 신하를 예우하기 위해 왕명의 특전으로 건립된 7칸 규모의 가옥이었다.

허목은 은거당이 완성된 후 당호(堂號)를 ‘수고은거(壽考恩居)’라 하고 괴석원(怪石園), 십청원(十靑園) 등의 정원을 손수 가꾸었다. 은거당에는 허목의 각종 유품을 비롯해 정원의 각종 괴석, 희귀목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건물은 전소했고 그나마 남아 있던 정원의 괴석과 희귀목들도 모두 밀반출 됐다. 다만 근래에 십청원에 있었다는 석호(石戶) 명문 괴석이 발견돼 허목의 묘 아래에 옮겨져 있다.

현재 은거당터에는 ‘은거당옛터’라 음각한 커다란 안내 비가 조성돼 있다. 은거당은 소치 허련이 그린 ‘십청원도’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춤ㆍ음악ㆍ떡이 없는 문화제…제2회 미수문화제를 기다리며

허목은 강원도 삼척, 경남 창원과 합천 전남 나주 등지에서 전설처럼 전해 오는 큰 인물이다.

허목의 묘는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민간인통제구역 인근에 있으며 경기도 지정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연천에서 허목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경순 연천문화원장과 이준용 사무국장이었다.

이경순 원장은 “오래 전부터 연천의 대학자이며 행정가, 예술가, 정치가였던 미수 허목 선생을 기리는 문화제를 개최하고 싶었지만 예산이 따라주지 않아 못했다”며 “비록 적은 예산이지만 시작이라도 해보면 결국에는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심정으로 제1회 미수문화제를 개최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천문화원은 2012년 10월 19일 연천수레울 아트홀에서 제1회 미수문화제를 개최했다. 이날 문화제에는 김규선 연천군수, 왕영관 연천군의회 의장을 비롯한 내빈들과 양천허씨 대종회장 허찬씨, 미수 허목 선생의 후손, 군민 등 200여 명이 자리를 빛냈다.

미수문화제는 크게 서예대전과 학술회의로 나눠 진행됐다. 서예대전에선 박대명씨(의정부시)가 대상을, 유연일씨(고양시)와 홍영섭(의정부시) 각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패널로 양태진 박사(전 인천대 교수), 이도남 건국대 사학과 교수, 최영택 전 서경대 교수 등이 나서 미수에 대한 다양한 주제발표와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양천허씨 대종회장인 허찬(미수 허목선생 12대손)씨의 감회도 남달랐다.

“연천문화원에서 미수문화제와 허목 선생과 관련된 학술대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 후손된 사람으로 뜻깊은 일”이라며 “권력의 집행자로서가 아니라 학자로서, 임금을 보필했고 늘 군덕(君德)과 시정에 대한 의견을 올려 정치가 바로 되게 한 허목 선생의 삶이 다시 한번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제1회 미수문화제’는 다른 문화제와 달리 가수도, 댄서도 없다. 떡도 음료수도 없다. 시끌벅적하지는 않다. 오로지 전서체 대가이며 조선 중기 대학자인 미수 허목선생을 기리고 도학과 철학에 대한 역사적 중요성과 예술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미수문화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제1회 미수문화제가 매년 지속적으로 발전해 미수 허목에 대한 더욱 심도있고 활발한 논의를 이루어내 연천의 위상을 높여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하고 더 나아가 전국 규모의 학술문화의 장으로 성장하길 기대해 본다.

글_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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