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를 ‘오직 나’로 알고 있다. 나는 둘도 셋도 아닌 오직 나로서 나일뿐이라는 이야기다. 아니, 그러면, 내가 나지 내가 너란 말이야? 이렇게 따져 물을 수도 있으리라. 그런 말이 아니다. 오직 ‘나인 나’라고만 하면서도 우리는 종종 ‘내안의 나’를 찾아 떠난다는 둥, 나의 참모습을 발견했다는 둥, 나의 ‘다른 나’를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안의 나는 누구이며, 나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실제로 내안에 다른 내가 존재하는 것이며, 그 존재를 아는 것이 나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것일까? 어이없어 보이는 이 질문은 사실 서구철학사의 오랜 화두였다. 오래전, 플라톤은 이데아가 참된 존재이며 물리적 대상은 그저 한낱 이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주장했고, 20세기의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시켰다. 그에 따르면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줄 때 의미를 갖는다.
권경엽은 내안의 나를 그린다. 내안의 나를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안에는 무수한 ‘나의 나’들이 존재하니까. 그 모습들도 천차만별이다. 내가 어떤 모습을 상상하느냐에 따라 내안의 나는 달라진다. 내가 어떤 상태, 상황, 현실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혹은 내가 어떤 삶의 철학과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존재’의 참모습은 천태만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경엽의 인물들은 모두 하나의 감정선을 따라 표현된 듯하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영혼의 상처에 관한 것이다. Tearful을 우리말로 풀면, 울고 있는, 울먹이는, 눈물을 자아내는, 눈물 어린의 뜻이다. 그렇다면 그 울음과 눈물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고해(苦海)라는 말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고해(苦海)는 고통의 바다, 고통의 세계를 뜻하며 Tearful Story로 번역된다. 불교에서는 고통과 괴로움이 끝이 없는 인간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부른다. 이때의 고통은 우리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근원적인 고통이다.
내안으로부터 서서히 존재를 드러낸 ‘나’는 하얀 붕대를 친친 감고 있다. 나는 내가 존재하므로 아프다는 것을 보여준다. 존재하는 것이 고통의 진실이라는 것을 응시한다. ‘오직 나’라고만 생각하는 나의 무지와 아집에 대해 나는 나에게 말하려는 듯하다.
나는 오늘 내안의 내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를 찾아 떠난다는 것이 어쩌면 해괴한 순정철학일 수도 있음을 안다. 내가 존재하는 곳에 내가 있음을 바로 믿는다. 그리고 그 존재의 존재자들이 또한 무수히 존재할 수 있고 그래서 고통에 차 있음을 또한 슬프게 깨닫는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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