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짧아졌다고들 난리다. 2100년이면 겨울여름만 있고 봄가을이 거의 없다는 뉴스도 나온다. 겨울여름 사이, 여름겨울 사이에 봄가을이 끼어들 시간 부족해도 봄꽃은 필 것이고 가을꽃도 만개할 것이다. 봄을 키워서 겨울여름 사이를 제 시간으로 돌리는 것이 중요하듯 봄꽃을 온 몸으로 즐기는 것 또한 중요하다. 즐기지 않으면 봄은 없다.
김성룡에게 숲은 치유이고 생철학의 화두를 깨치는 화두선이며 지극한 현실이다. 그의 작품들 거개가 그런 숲이라는 현실계와 현실 너머의 상징계를 바탕에 두고 출몰한다. 그러나 그의 숲에서 따듯한 봄과 봄꽃의 향연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숲은 늘 서늘한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런 그가 최근 ‘숲의 정령’을 그리기 시작했다.
‘숲의 정령’은 야릇한 동화 속 요정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다른 작품 ‘가을’이나 ‘숲의 사람’에서 엿볼 수 있듯이 ‘숲의 정령’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청바지를 입었거나 와이셔츠에 재킷을 껴입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모습이니까. 그런데 그들 모두 떡갈나무 잎으로 얼굴을 휘감고 있다는 사실이다. ‘숲의 정령’도 그렇다.
흰 비둘기를 한 손에 안고, 다른 손은 들어서 무언가를 지시하려 한다. 비둘기는 푸른빛과 붉은빛의 색채를 얇고 투명한 그늘로 표현해서 신성한 새의 이미지로 승화시킨다. 화면의 우측은 어둠에 휩싸여 있고 좌측은 녹음에 물들어 있다. 어둠의 향방은 온통 혼돈이어서 정령의 존재를 밝히는 실체성은 온통 핏빛 상처투성이고, 초록빛 그늘은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아, 이 이야기의 깊은 속뜻은 무엇이란 말인가?
숲의 정령인 존재자는 흰 비둘기처럼 신성한 흰 빛의 존재다. 그 흰 빛으로부터 숲은 치유의 영적 세계를 형성했을 터다. 그러나 어둠의 검은 혼돈이 몰아치자 존재자는 일순간 불안으로 뒤흔들린다. 불안의 가시들이 정령의 육체를 엄습한다. 숲은 핏빛 상처로 낭자하나 그것을 견디는 정령의 세계는 숭고하다. 그리고 그 견딤의 숭고가 이 장면의 사건이며, 찰나이다.
우리 모두는 신령한 존재들이다. 우리가 신령함을 상실했을 때 우리는 그저 나날을 사는 자들에 불과하다. ‘흰 빛의 존재’를 견디기 위한 고통은 필수적이다. 그 견딤이 우리를 우리답게 할 것이로되, 봄꽃 향기가 모든 것을 치유할 것이다.
김종길 큐레이터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