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향토사 연구ㆍ교육…뿌리에 대한 자긍심 고취
사실 성남시와 향토사의 조합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성남시의 발달 과정과 급격한 인구 구성 변화 때문에 그러하다. 순식간에 이뤄진 도시개발에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커녕 그 뿌리마저 사라졌을 것 같은 도시에서 향토사 붐이 일고 있다니, 왠지 부조화스럽다.
성남시는 서울시가 무허가 판자촌을 정비하기 위해 철거민의 이주정착지로 선택한 도시였다.
1969년 5월부터 1970년 6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서울 청계천변에 정착했던 도시저소득층이 대거 이주했다.
짧은 시간 대규모로 이뤄진 도시 개발로 서기전 18년 백제 시조 온조왕이 도읍지로 정한 하남위례성의 옛터로 추정되는 유서 깊은 지역으로서의 역사는 희미해졌다. 도시기반시설조차 형편없는 새로운 정착지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내야만 하는 이주민에게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을 터.
1989년 4월 성남시의 분당신도시 개발 계획을 발표, 이듬해부터 허허벌판에 세워진 분당에 새로운 인구가 유입됐다. 그들은 성남시가 아닌 ‘분당시’를 요구하며 지역 갈등을 빚기도 했다.
최근 40여 년간 성남시처럼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급격한 변화를 겪은 도시도 드물 것이다.
“갑작스러운 도시 개발에 역사도, 전통도, 위대한 일을 해낸 인물이 있다는 사실마저 묻혀버리거나 파헤쳐져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어쨌든 성남시는 두 차례의 개발붐에 빠르게 수도권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지만, 거꾸로 이 변화가 아킬레스건이 됐다.
신도시 개발 당시 교육 봉사를 벌인 것을 인연으로 서울에서 성남으로 이주, 30년간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성남문화원장으로 활동 중인 한춘섭 씨의 회상에서 그 치명적 약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지난 2010년 1월, 성남학 아카데미가 설립된 근본적 원인이기도 하다.
당시 성남문화원은 방방곡곡에서 모여 공동체 의식과 애향심 없는 지역민에게 수 백년전 성남의 역사와 훌륭한 인물을 알려 ‘개발 전부터 이미 살기 좋은 도시’라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붓글씨나 그림 그리기, 문예 강좌 등 보편적인 문화예술강좌 대신 요샛말로 ‘듣보잡’인 성남학을 개설했으니, 예산 확보나 수강생 모집의 어려움은 뻔했다.
첫 해 성남학 아카데미 대신 향토문화 아카데미로 명칭을 붙였다가 입소문에 수강생 모집이 원활해지면서 비로소 성남학으로 개명한 일례가 방증한다.
교육 대상은 퇴직 공무원과 교사 등 오피니언 리더로 설정했다. 오피니언 리더가 넓게 지식의 그물망을 펼쳐 ‘성남학’이 빠르게 확산되는 구조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정확한 타깃 설정은 명확한 효과를 가져온다. 실제로 성남학 수강생들은 초등 교과 강사나 문화해설사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믿을만한 입소문에 강의 인기도 높아졌다.
첫 해 출석인원이 고작 10명이었던 성남학 아카데미는 개발로 성남에서 갑자기 충남 당진으로 옮겨진 무덤을 찾아가는 등 다양한 현장답사와 지역민의 자긍심을 자극하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매번 신청자가 몰려 정원 20명인 강좌에 60명까지 등록한 상태다. 특히 올해에는 구도시에서 동일한 커리큘럼으로 강좌를 확대 운영하고 있다.
이제는 초심으로 돌아갈 때다. 지역민이 뿌리를 찾음으로써 자긍심과 애향심, 공동체 의식 등을 높이며 나아가 나라의 선진화를 이끄는 구성원을 양성하겠다는 당초 기획 의도 말이다.
이를 위해 최소한 성남학 교재 제작, 다양한 현장답사, 강사료 인상을 통한 강사진 확대 등의 지원이 필요하다.
이는 문화원이 갈망하는 직장인을 위한 야간반 개설과 청소년 대상 향토사 강의 확대를 위한 선행 조건이다.
이와 관련 한춘섭 원장은 “신도시는 시민의 단결력이 없어 애국심마저 흔들리는 국가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며 “문화원만이라도 정부와 지자체가 도외시하고 무관심한 영역의 향토사를 기록하고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지방자치가 실현되려면 지역민 주체가 돼 지역을 살려야 한다. 이 공허한 소리가 향토사를 통해 현실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지역의 미래를 고민해보는 단초가 되기를 응원해 본다.
류설아기자 rsa11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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