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안창홍의 ‘부서진 얼굴’

사람들의 말이 씨가 되었다. 봄을 즐길 틈도 없이 여름이 온다더니 요즘 날씨가 그렇다. 불과 2주 전만 하더라도 밤낮의 기온차가 늦가을 날씨를 방불케 하더니 이젠 완연히 여름이다. 물론 그 사이 봄꽃도 피고 새순도 돋고 아지랑이도 넘실거렸다. 그러나 그 모든 봄의 향연은 어이없게 막을 내렸다.

계절로서의 5월은 싱싱한 생명들의 축제임에 틀림없다. 오죽하면 계절의 여왕이라고 이름을 높여 찬양하겠는가! 그뿐인가, 5월은 노동절, 법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 스승의 날, 세종대왕 탄신일, 석가탄신일이 있고 5ㆍ18민중항쟁 기념일도 있으며, 심지어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참으로 5월은 날들의 날이다.

날을 만들어 기념한다고 기념의 의미와 상징이 그 날을 축복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날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아니니 그 날을 만들어 기념하는 것이 송구하다. 그 날들은, 제발 그 날만이라도 그들을 기념하라는 것이 아닌가. 산 어린이 산 어버이 산 스승의 날을 기념하려거든 어떤 날이 아니라 모든 날들이어야 할 것이다.

안창홍의 ‘부서진 얼굴’을 보면서 나는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망각의 삶을 떠올린다. 작가는 한 여인의 초상을 그렸으되, 마치 깨진 거울에 비친 얼굴처럼 그렸다.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면 화면의 균열들은 초상의 전체로부터 이탈된 어긋난 조각들이다.

작가에게 ‘부서지다’의 의미는 이렇듯 어긋난 조각들의 균열이다. 그는 오래된 초상 사진들을 칼로 도려내 듯 조각을 낸 뒤, 그 부분들을 전체로부터 조금씩 미끄러지게 했다. 언 듯 전체의 상은 견고하지만 미끄러진 부분들에 의해 상은 조금씩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부서진 얼굴’의 진심은 붕괴되는 얼굴이요, 해체되는 얼굴이다. 나는 그것을 망각이 시작되는 첫 단계라고 보는 것이다.

어린이를 망각하고 어버이를 망각하고 스승을 망각하고, 심지어는 민중항쟁의 역사도 망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삶이다. 모든 망각의 근원에는 ‘부서짐’, 즉 상(像)의 해체가 있다. 사진액자의 유리가 깨지듯 얼굴이 깨지는 것은 곧 망각이다. 이 망각의 늪으로부터 우리가 기억의 숲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삶의 속도를 내려놓고 천천히 내 자신을 돌아보아야만 한다. 내 삶을 축복해야만 한다. 5월의 활기가 내 안에서 움트도록 해야 한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