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신학철의 ‘한국근대사’

장마 같은 봄비가 전국을 적셨다. 30도를 웃도는 초여름이 벌써 시작되었으니 이제 봄은 끝이다. 5월의 붉은 꽃들도 이미 다 지고 없다. 꽃이 진 자리 옆으로 푸른 잎들이 무성하다. 초여름의 길목에서 꽃향기를 뿌리는 것은 아카시아뿐이다. 꽃이 필 때 아카시아 나무의 가시들도 시퍼렇게 날을 세우기 시작한다.

신학철은 1981년을 전후로 ‘한국근대사’ 연작을 시작했다. 여러 이미지를 합성하고 충돌시켜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포토몽타주와 이질적인 재료나 이미지를 오려 붙여서 부조리와 냉소적 충동을 겨냥한 콜라주 기법을 활용했는데, 포토몽타주 기법은 회화로 제작했고 콜라주는 콜라주 느낌 그대롤 살려서 그야말로 한국현대미술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19세기 후반의 이미지부터 작품이 탄생되었던 1980년대까지, 그가 수집하고 분류한 이미지들이 포토몽타주로 뒤섞여서 회화로 재탄생한 한국근대사는 그 자체로 거대한 ‘이미지 대서사시’였다. 근대이후의 장대한 사건의 역사를 사람의 역사로 몽타주하되, 마치 옹이진 거목이 뒤틀리며 자라는 듯한 군상(群像)의 이미지는 압권이었다.

마찬가지로 물질이 만연한 자본주의 현대사회의 부산물들을 오려붙인 콜라주 작업은 우리 사회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예언적 성찰로 제시한다. 언뜻 붉은 꽃처럼 보이는 이 작품 ‘한국근대사’ 속의 이미지들은 자본과 성욕과 식욕의 온갖 판타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판타지의 아우라에 권력과 전쟁의 도구들이 판친다.

최근 비영리 독립 언론 뉴스타파가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둔 한국인 명단을 실명으로 공개했다. 이 문제의 본질은 자본가들이 ‘조세피난’을 위해 국가를 무시하거나 아예 부정하고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자본가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면서도 그 부의 흔적들을 감추거나 부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혈안이다.

신학철은 1982년 서울미술관의 첫 개인전에서 자본의 모순을 통렬한 시선으로 제시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있는 미학적 증거가 되고 있다. 또한 그것은 그가 1970년대 아방가르디스트로 활약했던 당시의 청년정신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창조된 작업들이기도 했다.

자본의 욕망이 끝 간 곳의 실상은 디스토피아적 쾌락만이 난무할 뿐이다. 조세피난처로 간 자본의 난장이들이 바로 저기, 붉은 욕망의 불꽃 속에 있는 이유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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