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겨울과 씨름을 하며 널뛰기 했으나 그것은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니었다. 갑자기 춥다가 더워졌고 덥다가도 서리가 내렸으니 기상이변에 가까웠다. 실제로 북극을 에둘러 싼 찬 공기층의 균형이 깨지면서 너울지듯 일렁이니 그 영향이 작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갔다. 꽃바람에 취해 아지랑이 넘실대던 샛푸른 들녘의 아스라함도 어느 새 자취를 감췄다.
오월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봄날이 저물던 그날, 우리가 늘 ‘봄날’이라 불렀던 형은 지상의 소풍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유월의 둘째 날을 견디지 못하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새들이 날 저무는 때를 맞춰 낮은 비행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던 그 찰나였다. 오후 6시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면서 그 끝을 희미하게 강이나 숲에 기대는 시간일 뿐,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장례식 첫 날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이들은 그의 오래된 미술계 선후배들이었다. 그들 중 손문상은 작고한 최춘일 경기창작센터장이 어여삐 아끼던 후배였고 제자였다. 그는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다가 돌아갔고, 가자마자 곧 ‘봄날 兄, 그대 잘가라.’를 그려서 보내왔다.
그의 ‘봄날 兄’은 꽃잎이 휘날리는 봄의 들녘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흰 바탕에 검은 먹선을 휘두르듯 그린 목판화 풍의 이 그림은 그가 잘 다루는 컴퓨터 그림판으로 그린 것이다. 컴퓨터라고는 해도 그의 작업의 기원이 먹과 목판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그림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스승이자 선배였던 ‘최춘일 兄’의 작풍(作風)이기도 했다.
최춘일은 엄혹했던 1980년대의 정치현실을 미학적 현실로 사유하면서 실천했던 작가였고 기획자였다. 그는 그 시대가 요구했던 회화미학의 형식을 갖추되, 결코 가벼이 현실을 그 안에 담지 않았다. 장례식장 한 벽을 채운 그의 미발표 작품들은 그가 전통적인 불화나 역사 기록화의 형식을 차용해서 부조리한 현실을 ‘역사화’ 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작가의 삶 대신 환경운동가, 생태연구자, 문화행정가로 살아야만 했다. 잠시 내려놓은 붓을 목판 칼을 끝내 다시 들지 못했다.
그는 웃는다. 겨울을 견디고 새파랗게 새 잎 틔워낸 들판에서 봄의 환한 햇살과 마주하며 웃는다. 마치 화면 밖에서 그를 바라보는 우리들과 정면으로 눈 마주하며 봄이 오고 가는 소리를 들으라는 듯 새하얗게 웃는다. 손문상은 그렇게 우리에게 잊히지 않을 ‘봄날의 미소’를 새겨놓았다. ‘봄날 兄’은 그렇게 2013년의 봄과 더불어 기울었다. 나는 그 기운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든다. “잘가요, 봄날 兄! 형이 꿈꾼 세상 이제 우리가 이룰게요.”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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