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최평곤의 ‘구럼비 지킴이’

어젯밤부터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 바람은 찬바람이었으나 뜨거웠다. 세차게 휘몰아가는 바람 떼는 거친 숨소리로 훅훅 거렸다. 기상캐스터는 집중호우라고 말하면서 맑게 웃지만, 그 비의 세참이 훅훅 거림이 거센 몸짓의 몰아침이 내게는 범상치 않았다. 예부터 선인들이 날씨의 흐름을 천기(天氣)로 보았듯 나 또한 6월의 이 비바람을 하늘의 이치로 보는 탓일 터다.

2013년의 6월은 뜨겁게 기억될 것이다. 이달 초 수원 민중미술계의 맏형 최춘일 형을 보냈고, 중순에는 ‘노래하는 스님’ 범능 스님을 보냈으며, 엊그제는 제주출신의 민족광대 민족심방인 정공철 형을 보냈다. 이들의 돌아감을 하늘의 이치라고 보는 이유는, 아니 원망하는 데에는 그들이 모두 쉰셋의 동갑내기들이요, 이제 겨우 하늘의 뜻을 깨달아 삶의 지평을 넓히려는 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아침 제주 신산공원 4ㆍ3해원방사탑 앞 정공철 형의 영결식에서 놀이패 한라산 후배들이 초혼 굿춤을 추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헌화하고 강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강정의 너른 구럼비에서 홀로 세 형을 추모할 작정이었다. ‘구럼비 지킴이’의 품속으로 걸어 들어가 고요히 파랑새의 비상을 꿈꿀 요량이었다.

최평곤의 ‘구럼비 지킴이’는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구럼비 지킴이’는 우연처럼 필연처럼 대추리의 ‘들지킴이’의 부활이었다. 2007년 4월 대추리 매향제에서 활활 불태워졌던 들지킴이가 2011년 여름 제주 강정에 구럼비 지킴이로 다시 세워졌으니까. 그는 철골로 뼈대를 만들고 대나무 편(片)을 이어 붙여 5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지킴이를 탄생시켰다.

구럼비 지킴이는 장승처럼 하나의 경계요, 이정표요, 신(神)이다. 괴엄(魁嚴)한 표정 없이 숭엄(崇嚴)한 자태로 천지간에 서 있잖은가! 지킴이가 선 이래로 사람들은 저항의 고비마다 이곳에 고사지내고 불 밝히며 액병(厄病)을 빌었다. 그런데 그 구럼비 지킴이가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서 해안가로 이어지는 길들은 잘려나갔고, 잘린 그곳에 거대한 철판 울타리가 박혀 있었다.

구럼비가 보이는 공사장 옆 포구로 달려가 강정 앞바다에 섰다. 방파제 끝에 서서 바다와 구럼비와 범섬과 한라산과 그리고 해군기지 공사장을 살폈다. 신을 접하고 모셨던 신성한 구럼비에 기계들이 박혀서 무지막지한 시멘트구조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아, 나는 그곳에서 형들과 따듯한 이별을 고할 수 없었다. 비는 마음으로 그저, 이 땅에 평화를 주소서, 가시거든 구럼비 지킴이로 신령하게 부활하소서, 할 뿐이었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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